[역사]샌드크리크 학살 161주년… 콜로라도의 아픈 과거를 되돌아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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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를 약속받은 인디언 마을에서 200명 학살

이번 주 토요일(11월 29일)은 콜로라도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사건 중 하나인 ‘샌드크리크 학살(Sand Creek Massacre)’ 161주년이 되는 날이다. 1864년 콜로라도 자원군이 평화를 약속받았던 샤이엔(Cheyenne)과 아라파호(Arapaho) 인디언 마을을 기습 공격해 200여 명을 살해한 이 사건은, 미국 서부 개척 시대의 어두운 단면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으로 남아있다.

금 러시와 갈등의 시작

1858년부터 1859년 사이, 콜로라도에서 금이 발견되면서 일확천금을 꿈꾸는 백인들이 대거 몰려들었다. 이들은 샤이엔과 아라파호 부족의 버팔로 사냥터와 영토를 무단으로 침범했고, 갈등은 급격히 고조되었다.

샤이엔 부족의 추장 블랙 케틀(Black Kettle)과 화이트 앤털로프(White Antelope)는 평화적 해결을 모색했다. 1861년 그들은 워싱턴으로 가서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을 만났고, 링컨은 블랙 케틀에게 미국 국기를, 화이트 앤털로프에게는 평화 메달을 선물했다.

평화 협상의 배신

1864년, 긴장은 더욱 고조되었다. 블랙 케틀과 다른 추장들은 덴버로 가서 콜로라도 주지사 존 에반스(John Evans)와 군 사령관 존 치빙턴(John Chivington) 대령과 평화 회담을 가졌다. 회담을 마친 추장들은 평화적 합의가 이루어졌다고 믿었고, 안전지대로 약속받은 샌드크리크에 마을을 세웠다.

하지만 1864년 11월 29일 새벽, 치빙턴 대령과 그의 부대는 샌드크리크를 공격했다. 블랙 케틀은 처음에 링컨이 준 성조기를 흔들며 자신들이 우방임을 알리려 했다. 그러나 치빙턴은 발포 명령을 내렸다.

끔찍한 학살의 현장

당시 현장에 있었던 미국 정부의 인디언 통역관 존 S. 스미스(John S. Smith)는 이듬해 의회 청문회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마을에는 약 500명의 샤이엔과 아라파호 부족민이 있었고, 그 중 절반 가량이 여성과 어린이였다. 새벽 공격이 시작되자 무장하지 않은 이들은 도망쳤지만, 약 70명의 전사들이 강둑 아래 몰렸고 미군은 완전히 포위한 채 계속 사격했다.

스미스는 “강둑에 누워있는 약 70구의 시신을 봤는데, 대부분이 여성과 어린이였다”며 “남성 전사는 30명 정도였고, 나머지는 여성과 갓난아기를 포함한 어린이들이었다”고 증언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학살 이후의 만행이었다. “시신들은 칼로 토막났고, 두개골이 으스러졌으며, 생후 2~3개월 된 아기부터 전사에 이르기까지 모든 연령대가 있었다”고 스미스는 증언했다. 이러한 만행은 미군 병사들에 의해 자행되었다.

영웅인가, 학살자인가

흥미롭게도 당시 덴버의 지역 신문 ‘로키마운틴 뉴스(Rocky Mountain News)’는 이 사건을 “인디언 전쟁에서 가장 찬란한 무공”이라고 칭송하는 기사를 실었다. 신문은 “콜로라도 병사들이 다시 한번 영광으로 자신들을 덮었다”며 치빙턴의 공격을 찬양했다.

그러나 곧 논란이 일었다. 워싱턴에서 의회 조사가 시작되었고, “인디언들이 항복한 후 살해되었으며 대부분이 여성과 어린이였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이에 로키마운틴 뉴스는 후속 기사에서 “이 ‘우호적 인디언’과 ‘항복한 마을’ 운운하는 얘기는 우리에게는 헛소리다”라며 반박했다.

정치적 야욕의 희생양

스미스의 증언에 따르면, 치빙턴 대령은 콜로라도 연방 하원의원 선거 출마를 준비 중이었고, 이 공격은 정치적 목적이 있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그는 3개월 임기의 자원군 부대를 지휘하고 있었는데, 이들이 “아무 공도 세우지 못하고” 해산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더욱이 블랙 케틀과 다른 추장들은 공격 직전 덴버에서 치빙턴과 만났고, 그는 이들에게 가장 가까운 군사기지로 가서 무기를 반납하고 보호를 요청하라고 조언했다. 추장들은 그의 말을 따랐지만, 그 결과는 학살이었다.

샌드 크릭 대학살 국립사적지(출처=https://www.nps.gov)

역사적 의미

샌드크리크 학살은 미국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의회 조사 결과 이 공격은 학살로 규정되었고, 치빙턴은 군사적 책임을 회피한 채 군에서 물러났지만, 어떠한 형사 처벌도 받지 않았다.

블랙 케틀 추장은 이 학살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았지만, 4년 후인 1868년 조지 암스트롱 커스터(George Armstrong Custer) 장군이 이끄는 또 다른 공격에서 사망했다.

오늘날 샌드크리크 학살 현장은 국립역사유적지(National Historic Site)로 지정되어 있으며, 이 비극을 기억하고 교훈으로 삼기 위한 장소가 되었다. 콜로라도에 거주하는 한인들에게도 이 지역의 아픈 역사를 이해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161년 전 그날, 평화를 믿었던 이들이 겪은 비극은 힘의 불균형 속에서 약속이 얼마나 쉽게 깨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뼈아픈 역사의 한 페이지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