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오피니언사설 침묵이라는 장벽을 허무는 한 마디, "너 요즘 어때?"

[칼럼] 침묵이라는 장벽을 허무는 한 마디, “너 요즘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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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은 새로운 삶의 시작이지만, 동시에 익숙했던 모든 것을 잃는 경험이기도 하다. 언어, 관계, 일상의 리듬, 그리고 힘들 때 전화 한 통 할 수 있는 사람들. 많은 한인들이 낯선 땅에서 그 빈자리를 “참는 것”으로 채워왔다. 특히 막 이민 온 청년들, 유학생들, 또는 오래 살았어도 여전히 뿌리내리지 못한 느낌을 받는 이들은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속으로 조용히 무너지는 경우가 생각보다 훨씬 많다. 본지가 두 달간 공익 광고로 소개해 온 ‘Seize The Awkward(어색함을 붙잡으세요)’ 캠페인은 바로 그 조용한 위기에 주목한다. 가볍게 던진 한마디처럼 보이지만, 이 캠페인이 담고 있는 메시지는 결코 가볍지 않다.

몇 달 전, 우연히 마주친 한 젊은이의 손이 눈에 걸렸다. 상처가 있었다. 조심스레 이유를 묻자 그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내 눈을 똑바로 보며 되물었다. “정말 알고 싶으세요?” 짧은 침묵이 팽팽하게 흘렀다. 나는 그 어색한 순간을 피하지 않았다. “그래, 무슨 일인지 정말 알고 싶다. 다른 사람한테는 말하지 않을게.” 진심을 전하자, 그는 그제야 오랫동안 묻어두었던 이야기를 천천히 꺼내놓기 시작했다.

그는 서른이 훌쩍 넘은 성인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칠십을 바라보는 나이였다.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속으로 잠시 멈칫했다. 어린 시절부터 이어진 아버지의 손찌검, 그리고 그게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는 고백이었다. 학대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동시에 그 아버지가 살아온 시대도 함께 떠올랐다. “사랑의 매”라는 말이 버젓이 통용되던 시절, 아이를 엄하게 다루는 것이 자식을 잘 키우는 방법이라 굳게 믿었던 세대. 그 믿음을 품은 채 낯선 미국 땅에 뿌리를 내렸고, 이민자로서의 팍팍한 삶 속에서 그 믿음을 돌아볼 여유조차 없었을 것이다. 문제는 그 믿음이 몸에 한번 새겨지면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식이 다 자라 어른이 되어도, 손이 먼저 올라가는 습관은 그대로 남는다. 의도가 사랑이었다 해도, 남겨진 상처는 사랑이 아니다.

그리고 그 상처를 수십 년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혼자 삭여왔다는 것, 그것이 어쩌면 더 깊은 고통이었을 것이다. 한참을 쏟아내고 나서 그는 작게 말했다. “누군가한테 말하니까 좀 나아지는 것 같아요.” 그 한마디가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어색함을 외면하지 않고 그냥 거기 있어 주는 것, 그것이 지친 사람에게 닿는 첫걸음이라는 걸 그날 비로소 실감했다.

사실 우리 주변에는 이 청년처럼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속으로 힘겨운 시간을 보내는 이들이 생각보다 많다. 번아웃, 불안, 우울감, 깊은 외로움. 거창한 이름을 붙이지 않아도 마음이 무너지는 경험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이민자의 삶은 그 무게를 더 무겁게 만들기도 한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여기까지 왔는데 “힘들다”는 말을 입 밖에 내는 것이 마치 그 결정을 부정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참고, 더 혼자 감당하려 한다. 하지만 참는 것이 강함이 아니라 고립이 되는 순간이 반드시 온다.

우리는 흔히 타인의 고통 앞에서 움츠러든다. ‘내가 끼어드는 건 아닐까’, ‘괜히 분위기 어색해지면 어쩌지’라는 두려움에 입을 다무는 것이다. 하지만 이 캠페인이 전하는 메시지는 단순하다. 바로 그 어색한 순간을 기회로 삼으라는 것이다. 전문가처럼 완벽한 조언을 해줄 필요는 없다. 해결해 주려 애쓰지 않아도 된다. 그냥 그 자리에 함께 있어 주는 것, 그것으로 충분하다.

다행히 우리 주변엔 도움의 손길이 있다. 본지에 광고를 게재 중인 ‘Tangled Minds’는 한국어 상담 서비스를 통해 우울증, 불안장애, 번아웃 등 다양한 정신 건강 문제를 지원하고 있다(720-383-7095). 영어로 감정을 표현하는 것 자체가 또 하나의 장벽이 되는 이민자들에게, 모국어로 털어놓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위안이 된다. 또한 ‘SeizeTheAwkward.org’에서는 대화를 시작하는 법과 다양한 무료 도구를 찾아볼 수 있다. 혼자 감당하기 버겁다면, 도움을 받는 것은 약함이 아니라 용기다.

한인 사회 특유의 ‘참고 견디는’ 문화, 그리고 이민자로서 짊어진 무게는 때로 서로의 아픔을 보지 못하게 하는 장막이 된다. 대물림된 상처는 그 장막을 더욱 두껍게 만든다. 하지만 내가 만난 그 청년처럼, 많은 이들이 누군가 먼저 그 침묵을 깨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너 요즘 어때?”는 가벼운 인사가 아니다. 그 짧은 한마디가 누군가에게는 오늘 하루를 버텨낼 이유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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