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오피니언발행인 노트 예일대 졸업 연단에서 고백한 파친코 이민진의 ‘두 개의 시간’

[칼럼] 예일대 졸업 연단에서 고백한 파친코 이민진의 ‘두 개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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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5월이면 미국 전역의 대학 캠퍼스는 졸업 가운의 물결과 희망 섞인 박수 소리로 가득 찬다. 수많은 연사가 단상에 오르고, 화려한 성공을 다짐하는 말들이 봄바람에 흩어진다. 지난달 예일대학교 졸업식 연단에 선 한 한인 여성의 이야기는 사뭇 달랐다. 화려한 성공담을 늘어놓는 대신, 오래전 그 캠퍼스에서 겪었던 상처와 분투를 꺼내 놓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세계적 베스트셀러 『파친코』의 작가 이민진이다. 1990년 예일대 역사학과를 졸업한 그녀는 가장 빛나는 동문의 자격으로 모교의 ‘클래스 데이’ 연사가 되어 돌아왔다. 하지만 그녀는 스포트라이트 대신 36년 전 자신이 느꼈던 고립감과 아픔을 먼저 고백했다. 그리고 자신에게 편견 어린 잣대를 들이대던 교수들에게 당당히 던졌던 그 일갈을 다시 한번 전했다.

“내가 글을 쓸 줄 모르는 게 아니라, 당신이 읽을 줄 모르는 것입니다.”

7살에 뉴욕 퀸즈로 건너온 이민진의 부모는 맨해튼에서 5평 남짓한 보석상을 주 6일 운영하며 딸을 예일로 보냈다. 그러나 상아탑은 따뜻하지 않았다. 한 역사학 교수는 “아시아계 학생들은 역사를 쓸 줄 모른다”며 한국계 학생들에게 낮은 점수를 매겼고, 또 다른 교수는 영어가 제2외국어라는 이유만으로 그녀에게 보충 수업을 강요했다.

낯선 땅에서 자녀를 키우는 우리 한인 부모들에게 이민진의 이야기는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아이들은 교실 안에서, 학교 복도에서 말없이 비슷한 시선을 견디고 있을지 모른다. 성적이 좋아도 “수학만 잘하겠지”라는 편견, 발음이 조금 다르다는 이유로 감수해야 하는 무시. 부모에게는 차마 꺼내지 못한 채 혼자 삼키는 그 깊은 상처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찌릿해진다. 이민진이 30년 전 명문대 예일에서 겪은 일이, 지금 우리 자녀들이 겪는 현실과 얼마나 닮아 있는지 공감이 가는 대목이다.

하지만 이민진은 무너지지 않았다. 그녀는 블라인드 글쓰기 대회에서 비소설·소설 부문을 동시에 석권하며 실력으로 응답했고, 불합리한 제도에 맞서 학생 200명을 모아 학부모들에게 편지를 보내는 등 대학을 압박했다. 결국 예일은 그녀가 졸업하던 해, 한국어 수업을 정식으로 개설했다. 한 학생의 용기가 제도를 바꾼 것이다. 시련은 그녀를 주저앉히는 대신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

차별만이 시련의 전부가 아니었다. 대학 3학년 무렵, 의사로부터 “20대나 30대 초반에 간암으로 사망할 가능성이 크다”는 청천벽력 같은 진단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절망하지 않았다. 삶의 끝을 마주했던 그 절망적인 시간은 오히려 그녀에게 시간을 다르게 바라보는 눈을 선물했다. 이민진은 고대 그리스의 두 시간 개념, ‘크로노스(Chronos)’와 ‘카이로스(Kairos)’를 인생의 나침반으로 삼았다.

크로노스는 달력과 시계로 흐르는 물리적인 시간이다. 마감과 목표, 경쟁이 지배하는 이 시간 속에서 우리는 늘 쫓기며 살아간다. 반면 카이로스는 삶을 바꾸는 결정적 순간, 내면의 가치를 좇는 질적 시간이다. 그녀는 이 둘을 ‘시간의 이중초점 안경’이라 불렀다. 오늘 해야 할 일을 챙기는 크로노스의 삶 속에서도, 내 인생에서 무엇이 진정으로 중요한지를 놓치지 않는 카이로스의 시선을 유지하라는 조언이다.

그녀 스스로도 크로노스의 시간표로는 한참 ‘뒤처진’ 사람이었다. 로스쿨 졸업 후 억대 연봉의 변호사를 26살에 내려놓고 작가의 길을 택해, 첫 작품을 내기까지 12년, 『파친코』 출간까지 다시 10년이 걸렸다. 아버지가 ‘거북이’라 불렀던 그녀의 걸음은 남들보다 느렸지만, 결국 더 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다.

“시간은 우리의 적이 아니라 친구다.”

그녀가 졸업생들에게 남긴 이 마지막 말은 우리 이민 사회의 부모들에게도 큰 울림을 준다. 성공과 생존이라는 크로노스의 톱니바퀴에 쫓기며 오늘도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일구는 이민자들에게, 그리고 부모에게 말 못 한 채 혼자 버텨온 우리 아이들에게 이민진은 말하고 있다. 당신이 걸어온 그 길, 당신이 견뎌온 그 시간 자체가 이미 ‘카이로스’였다고. 그러니 이제는 조급함을 잠시 내려놓고, 그저 묵묵히 자신의 삶을 써 내려가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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