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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세 참전용사, 기념비 앞에서 멈춘 시간…박종열 옹의 6·25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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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7일 오로라 제너럴스공원에서 열린 한국전쟁 참전용사기념비 헌정식에는 올해 95세의 한국전쟁 참전용사 박종열 옹이 사위 원범 씨와 함께 참석했다.

거동이 불편한 박 옹은 휠체어를 타고 행사장을 찾았다. 완공된 기념비를 천천히 바라보는 그의 표정에는 전쟁에서 먼저 떠난 전우들과 지난 70여 년의 세월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듯했다.

이날 여러 방송사와 언론사도 박 옹에게 관심을 보이며 인터뷰를 진행했지만, 고령과 건강상의 이유로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누기는 어려웠다.

콜로라도타임즈는 헌정식에 앞서 지난주 사위 원범 씨를 만나 박 옹의 참전 경험과 삶의 이야기를 미리 들었다. 원 씨는 장인인 박 옹이 가족들에게 여러 차례 들려준 전쟁의 기억과 기념비 건립에 뜻을 보탠 이유를 대신 전했다.

박종열 옹은 1931년 9월 20일 경상북도 상주에서 태어났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당시 그의 나이는 만 19세에 불과했다.

집안의 외아들인 독자였던 그는 일찍 결혼해 이미 어린 딸을 둔 가장이었다. 처음에는 정규 군인으로 입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전쟁이 확대되고 병력이 부족해지면서 결국 전선으로 향하게 됐다.

박 옹은 약 열흘 동안 총기 사용 등 기초 군사훈련을 받은 뒤 문경새재 전선에 투입됐다. 충분한 준비나 체계적인 훈련을 받을 시간도 없이 열아홉 살의 젊은 가장은 전쟁터 한가운데로 향해야 했다.

원범 씨는 “장인어른께서는 짧은 훈련만 받고 바로 전선에 투입됐다고 말씀하셨다”며 “주변 부대가 후퇴하면 함께 후퇴하고, 전진하면 따라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고 들었다”고 전했다.

지난 27일 한국전쟁 참전용사 기념비 헌정식에 참석해 CBS방송국과 인터뷰하는 박종열옹과 통역해주는 이철범 준비위원회 이사

박 옹의 기억에 가장 깊이 남은 것은 전투의 승패나 자신의 공적이 아니었다. 총에 맞아 쓰러진 젊은 전우가 마지막까지 어머니를 부르며 숨을 거두던 모습이었다.

원 씨는 “장인어른께서는 죽어가던 동료 군인이 끝까지 어머니를 찾던 장면을 평생 잊지 못하셨다”며 “그 이야기를 가족들에게 여러 차례 들려주셨다”고 말했다.

당시 전쟁터에 투입된 군인들 가운데는 10대 후반과 20대 초반의 젊은이들이 많았다. 삶을 제대로 시작해보기도 전에 가족을 떠나 전선에 나서야 했고, 수많은 청년이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박 옹 역시 아내와 어린 딸을 남겨둔 채 전쟁터로 향해야 했다. 가족에 대한 걱정은 전쟁을 더욱 견디기 어렵게 했지만, 동시에 반드시 살아 돌아가야 한다는 의지가 됐다.

원 씨는 “장인어른께서는 독자였고 이미 어린 딸도 있었다”며 “가족을 생각하며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는 마음으로 전쟁을 견디셨던 것 같다”고 전했다.

원범 씨의 친부 역시 한국전쟁 참전용사였다.

원 씨의 부친은 군수물자를 운반하는 수송부에서 복무했으며, 전쟁 중 다리에 파편상을 입었다. 다리를 절단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의 큰 부상이었지만 가까스로 다리를 지킬 수 있었고, 이후에도 날씨가 흐리거나 비가 오는 날이면 부상 부위의 통증에 시달렸다고 한다.

한 가족 안에서 장인과 친부가 모두 한국전쟁 참전용사였던 셈이다. 두 사람이 가족들에게 남긴 공통된 메시지는 분명했다. 전쟁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참혹하며, 다시는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박종열 옹은 전쟁이 끝난 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가족을 책임지며 살아갔다. 이후 1983년 무렵 큰딸의 초청으로 미국에 이민해 콜로라도에 정착하며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미국에서도 그의 삶은 성실한 노동의 연속이었다. 원범 씨에 따르면 박 옹과 부인은 오로라의 미션 비에호 초등학교(Mission Viejo Elementary School)에서 청소 업무를 맡아 은퇴할 때까지 근무했다.

낯선 이민 생활 속에서도 부부는 묵묵히 학교를 관리하며 가족의 삶을 일궜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가족을 지켜냈던 박 옹은 미국에서도 성실함으로 삶을 이어갔다.

은퇴 후에는 파커 자택에 비닐하우스를 설치하고 농사를 지었다. 직접 기른 채소와 농산물 일부는 판매했고, 수확한 농산물을 이웃들과 나누며 소박한 삶을 이어갔다.

전쟁과 이민이라는 굴곡진 세월을 지나온 뒤에도 그는 손에서 일을 놓지 않았다. 땅을 일구고 씨앗을 심으며 살아온 삶은 그의 성실한 인생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러나 전쟁의 기억과 전우들의 희생은 오랜 세월이 흘러도 그의 마음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박종열 옹은 오로라 한국전쟁 참전용사기념비 건립에도 깊은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성원했다. 가족들도 박 옹이 기념비 건립을 위해 기부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구체적인 기부 금액은 알지 못한다고 전했다.

원 씨는 장인어른이 직접 전쟁을 겪으며 전우들의 희생과 전쟁의 참상을 경험했기 때문에 기념비 건립을 누구보다 중요하게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기념비는 단순히 과거의 전쟁을 기록하는 시설이 아니었다. 한국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한인 2세와 3세, 그리고 미국 사회에 대한민국이 어떤 희생을 겪었는지 알리고, 오늘의 자유와 평화가 수많은 참전용사의 희생 위에 세워졌다는 사실을 전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젊은 시절의 박종열 참전용사 부부

박 옹은 자신의 조국이 아닌 한국을 지키기 위해 참전한 미국과 유엔군 장병들에 대해서도 늘 깊은 감사의 마음을 갖고 있었다.

원 씨는 “장인어른께서는 미국과 유엔군 참전용사들이 젊은 나이에 남의 나라 전쟁에 와서 목숨을 걸고 싸워준 것에 대해 늘 감사하게 생각하셨다”고 전했다.

열흘 남짓한 훈련을 받고 문경새재 전선으로 향했던 열아홉 살 청년은 어느덧 휠체어에 의지해야 하는 95세의 노병이 됐다.

지난 27일 기념비를 말없이 바라보던 박종열 옹의 모습은 한국전쟁이 결코 역사책 속 이야기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일깨워 주었다.

95세 참전용사 박종열 옹이 기념비를 통해 후세에 남기고자 한 메시지는 분명하다. 전쟁의 참혹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 자유와 평화를 위해 희생한 참전용사들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다시는 이 땅에 전쟁이 반복되지 않도록 다음 세대가 역사의 교훈을 이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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