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사하셨어요’에 담긴 정… 산속에서 이어진 한국 입양가족의 여름
매년 여름이면 콜로라도 산자락에는 특별한 만남이 이어진다. 프레이저 YMCA 스노우마운틴 랜치에서 열리는 코리안 헤리티지 캠프다. 올해 제35회를 맞은 캠프는 6월 18일부터 21일까지 나흘간 열렸으며, 약 450명의 한인 입양아와 입양가족, 자원봉사자들이 함께했다.
올해 참가 규모는 예년에 비해 다소 줄었다. 연초 등록 시기부터 전쟁 여파와 국제 정세 불안, 물가상승, 항공권 가격 급등 등이 겹치며 먼 지역에서 방문하는 가족들에게 부담이 커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숫자가 줄었다고 캠프의 의미까지 작아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이 더 선명하게 보였고, 오래 이어져 온 관계의 깊이는 더욱 크게 느껴졌다.


코리안 헤리티지 캠프는 해마다 같은 장소에서 열리고, 한글, 한국 음식, 전통문화, 공연, 야외 활동 등 비슷한 프로그램으로 진행된다. 그러나 매년 만나는 사람들의 사연은 다르다. 지난해보다 훌쩍 자란 아이들, 처음에는 낯설어하던 아이가 친구를 만들고 웃는 모습, 부모의 손을 잡고 걷던 아이가 어느새 청소년이 되어 캠프의 중심에 서는 장면은 이 캠프가 왜 계속 이어져야 하는지를 조용히 보여준다.



수백 명에게 한식 점심을 나눠주는 봉사 현장은 캠프의 의미를 가장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자리다. 밥과 반찬을 나누다 보면 입양가정들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지켜보게 된다. 간단하게나마 “감사합니다”라고 한국말로 인사하는 가족들이 있고, 아이들은 아직 서툴러도 대부분의 어른들은 젓가락을 사용해 밥을 먹는다. 올해는 특히 음식이 더 맛있다는 말이 여러 곳에서 들렸다. 한 끼의 식사는 단순한 점심이 아니라, 아이들과 가족들이 한국을 기억하고 경험하는 가장 따뜻한 방식이었다.
콜로라도 스프링스의 헬렌 조 씨는 올해도 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수백 명분의 음식을 준비했다. 한 끼라도 아이들에게 제대로 된 한식을 먹이고 싶은 마음으로 불고기와 김치를 만들고 다량의 김을 대접했고, 그밖의 여러 반찬은 지역 업체와 후원자들의 정성으로 더해졌다.
덴버제자교회도 매일 수백 명분의 밥을 준비했고, 자원봉사자들은 그 음식을 싣고 산으로 향했다. 밥을 짓고, 고기를 재고, 반찬을 모으고, 산길을 올라 음식을 나르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 수고 속에는 한국의 맛을 통해 아이들에게 뿌리를 전하고 싶은 마음이 담겨 있었다.
올해 만난 한 한인 입양가정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 가족은 지난해 캠프에서 좋은 경험을 한 뒤 올해 는 부녀만 다시 캠프를 찾았다. 두 아들을 둔 부모는 한국에서 어린 딸을 입양했고, 세 살 무렵 심장병 수술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도운 뒤 미국으로 데려왔다. 시간이 흘러 이제 청소년이 된 딸은 아버지 곁에서 스스럼없이 장난을 치고 대화를 나누는 밝은 모습이었다.
한인 가정에서 자란 아이답게 부녀 사이에는 낯섦보다 자연스러운 친밀함이 먼저 느껴졌다. 입양이라는 단어보다 눈에 먼저 들어온 것은 아버지와 딸이 함께 쌓아온 시간이었다.


캠프는 자원봉사자들의 재능으로 채워진다. 포트콜린스의 한소리팀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참가했다. 공연 전날 세 시간 반을 달려 캠프장에 도착한 이들은 아이들과 학부모들에게 장구를 가르치며 한국 전통 장단의 흥을 전했다.
단원 대부분이 연세가 높아 거동이 쉽지 않은 덴버 농악팀도 산 위 캠프장을 찾아 오프닝 세리머니 무대에 올랐다. 힘찬 장단과 흥겨운 공연은 캠프의 시작을 알리는 울림이 됐다.
20년째 먼 곳에서 날아와 학생들을 가르치는 세바스찬 왕 교수도 올해 다시 캠프를 찾았다. 청년 시절부터 이어진 그의 봉사는 이제 결혼 후 아내와 함께하는 발걸음이 됐다. 그는 여전히 혼신의 힘을 다해 학생들을 지도하고 무대에 올랐다. 작년에 건강 문제로 한 해를 쉬었던 아빠밴드도 올해 다시 돌아왔다. 수개월 동안 연습한 이들은 멋진 밴드 공연으로 참가자들에게 큰 박수를 받았다. 마지막 밤에는 3456tea의 션 최가 디제잉을 맡아 참가자들이 함께 춤을 추고 음악을 즐기는 시간을 만들었다.
한복 체험과 쿠킹 클래스도 캠프의 즐거움을 더했다. 한 봉사자는 다양한 한복을 가져와 참가자들이 직접 입어보고 사진을 찍으며 즐길 수 있도록 도왔다. 쿠킹 클래스에서는 간단하게 만들 수 있는 한식을 소개하고, 참가자들이 함께 요리해 먹으며 한국 문화를 손으로 배우고 입으로 기억하는 시간을 가졌다. 누군가는 음식을 만들고, 누군가는 장구를 가르치고, 누군가는 한복을 입혀주고, 누군가는 음악으로 마지막 밤을 채웠다. 그렇게 각자의 재능이 모여 캠프의 하루가 완성됐다.
이 캠프를 지탱하는 힘은 오래된 자원봉사의 선순환이다. 청년 시절 혼자 봉사자로 왔던 이들이 결혼 후 자녀를 데리고 다시 오고, 그 자녀들이 입양아들과 함께 어울리며 자란다. 시간이 지나 아이들이 성인이 되면 다시 캠프 리더나 카운슬러가 되어 어린 참가자들을 돕는다. 20년, 30년 동안 이어지는 이 흐름은 어느 한 해의 행사가 아니라 세대를 건너 이어지는 공동체의 약속에 가깝다.
한국 입양의 역사도 이제 큰 전환점을 지나고 있다. 한국 정부는 해외입양을 단계적으로 줄여 2029년까지 해외입양 아동 수를 ‘0명’에 가깝게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2025년 10월부터는 헤이그 국제아동입양협약도 한국에서 발효돼 국제입양 절차는 아동 최선의 이익과 국가 책임을 더 엄격하게 따지게 됐다. 한국전쟁 이후 수십 년 동안 이어져 온 해외입양의 역사가 사실상 마지막 장을 향해 가고 있는 셈이다.
언젠가 해외입양 아동이 더 이상 생기지 않는다면, 코리안 헤리티지 캠프도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영원히 계속되지는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 시간이 더 소중하다. 새로 입양된 어린아이들은 부모와는 다르고 자신과는 닮은 얼굴을 한 한인 봉사자들을 빤히 바라본다.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낯섦과 반가움이 그 눈빛 안에 함께 담겨 있다. 그리고 그 작고 어린아이들이 해마다 조금씩 자라 청소년이 되고, 어느새 성인이 되어 결혼하고, 다시 자신의 자녀를 데리고 캠프를 찾는다. 오랫동안 이 자리를 지켜온 자원봉사자들에게 그 모습은 한없이 기특하고 감개무량한 순간이다.




올해는 한국 정부의 지원이 끊긴 상황에서도 지역사회의 도움으로 캠프가 무사히 마무리됐다.
박수지 코리안 헤리티지 캠프 코디네이터는 어려운 재정 상황 속에서도 지역 한인들의 후원과 자원봉사 덕분에 필요한 모금을 이어갈 수 있었다고 전했다. 상황이 여의치 않은 업체와 개인은 후원금으로 마음을 보탰고, 시간을 낼 수 있는 이들은 직접 캠프장을 찾아 자원봉사와 공연, 강의로 함께했다.
한국 사람들만이 자연스럽게 주고받는 정감 있는 말이 있다. “식사하셨어요?”라는 짧은 인사다. 안부를 묻는 말이면서 동시에 마음을 건네는 말이다. 아이들에게 밥을 먹이고, 한복을 입혀보고, 장구를 가르치고, 함께 노래하고 춤추는 이 캠프의 모든 순간에도 그 말이 담고 있는 마음이 흐른다. 다른 커뮤니티에서는 쉽게 느끼기 어려운, 한인들만의 끈끈한 ‘정’이 바로 이곳에서 조용히 이어지고 있다.


코리안 헤리티지 캠프는 단순한 여름 캠프가 아니다. 한국에서 태어나 미국 가정에서 자란 입양아들이 자신의 뿌리를 부끄러움이 아닌 자긍심으로 받아들이도록 돕는 자리다. 동시에 입양가정 부모들에게는 자녀의 문화를 이해하고, 비슷한 길을 걷는 가족들과 연결되는 소중한 시간이다.
해외입양의 시대가 저물고 있다 해도, 이미 이곳에서 자라고 있는 아이들에게 한국 사회의 책임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이 아이들이 자신을 이해하고, 한국을 따뜻하게 기억할 수 있을 때까지, 지역사회가 이 캠프를 함께 지켜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후원 단체 및 개인
이번 코리안 헤리티지 캠프는 지역사회 후원자들의 도움으로 진행됐다.
후원에는 콜로라도 해병대전우회, 김상권, 고영수, H마트 콜로라도, 강만식, 김항식, 김어빙, 스타모텔 박주디, 지오 헤어스타일, 김병/박인순, 캔버스 크레딧 유니언(Canvas Credit Union), KCC 한인기독교회, 헬렌 조, 할렐루야교회, 정순이, 풍성한교회, 콜로라도 타임즈, 세컨홈 커뮤니티 센터, 퀴 예 반 리어, 안헨리 치과 등이 함께했다. 음식 후원에는 신명관, 파라다이스 어덜트 데이케어, 박상희, 헬렌 조 그룹, 덴버제자교회가 참여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