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오피니언정준모의 지혜의 샘터레이크 워싱턴의 물결 위에서

레이크 워싱턴의 물결 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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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트를 가진 지인 부부의 따뜻한 초대 덕분에, 오래전 함께 신앙생활을 나누었던 귀한 성도들과 한나절 레이크 워싱턴의 물결 위를 누비는 은총의 시간을 가졌다. 보트가 잔잔한 수면을 가르며 나아갈 때마다 물결은 조용히 갈라졌고, 그 물결 사이로 지나온 삶의 장면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이날의 항해는 단순한 여행이 아니었다. 자연과 추억, 만남과 이별, 그리고 하나님의 섭리를 함께 묵상하는 영혼의 순례였다.

호수의 품에 안긴 도시
시애틀 동쪽에 자리한 레이크 워싱턴은 약 88제곱킬로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호수다. 서울의 여의도 면적이 약 2.9제곱킬로미터이므로, 레이크 워싱턴은 여의도의 약 30배에 해당한다. 서울의 서초구와 강남구를 합친 면적과도 비슷한 규모다. 호숫가를 따라 시애틀과 벨뷰, 커클랜드, 렌턴 등 현대적인 도시들이 자리하고 있지만, 물 위에서 바라본 풍경은 이상하리만큼 고요했다.
울창한 상록수와 수면을 향해 가지를 드리운 거목들, 그 너머로 솟은 도시의 건물들이 한 풍경 안에 어우러져 있었다. 거대한 자연의 품 안에 인간의 문명이 조용히 안겨 있는 모습이었다. 멀리 시애틀의 도시 풍경과 스페이스 니들이 시야에 들어오고, 맑은 날에는 레이니어 산의 흰 봉우리가 하늘 끝에 모습을 드러낸다.
사람의 손으로 세운 도시와 하나님께서 지으신 산과 호수가 한 장면 안에 어우러져 있었다. 그 풍경을 바라보며 인간의 문명이 아무리 높아져도 결국 자연의 큰 질서 안에 머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생각했다. 도시는 끊임없이 움직이지만, 호수는 깊은 침묵으로 모든 움직임을 품고 있었다.

벚꽃길에 남은 가족의 시간
그 순간 워싱턴 대학교의 기억도 선명하게 떠올랐다. 아들과 딸 내외가 치열하게 공부하며 졸업의 기쁨을 맞이했던 곳이다. 캠퍼스의 쿼드를 가득 채운 고목과 봄이면 눈부시게 피어나는 벚꽃, 오랜 역사를 품은 고딕 양식의 건물과 도서관의 깊은 정적이 마음속에 되살아났다.
도서관은 단순히 책을 보관하는 장소가 아니다. 한 세대가 쌓아 올린 지혜가 다음 세대에게 건너가는 다리다. 빌 게이츠의 후원으로 세워진 시설을 비롯하여, 워싱턴 대학교의 여러 도서관은 지성과 배움의 열기로 가득한 공간이다. 그곳에서 자녀들이 배우고 질문하며 자신의 길을 준비했다는 사실은 부모에게 큰 위로이자 감사의 제목이다.
자녀의 성공만을 바라는 것이 부모의 마음인 줄 알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바른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바라는 것이 더 깊은 소망임을 깨닫게 된다. 풋볼 경기장에 울려 퍼지던 젊음의 함성과 캠퍼스를 채우던 열정도 호수의 물결 속에서 은은한 메아리처럼 되살아났다.

기억과 죽음 사이에서
호수를 따라가다 개스웍스 공원 앞을 지날 때에는 마음이 더욱 숙연해졌다. 천국에 먼저 간 친한 친구가 생전에 가장 먼저 안내해 주었던 곳이다. 과거의 가스 공장 시설이 남아 있는 투박한 철제 구조물과 푸른 잔디, 잔잔한 호수가 어우러진 그곳에는 친구의 따뜻한 미소와 다정한 목소리가 아직도 머물러 있는 듯했다.
사람은 떠나도 기억은 쉽게 떠나지 않는다. 함께 걸었던 길과 나누었던 말, 아무렇지 않게 건넸던 웃음이 오랜 시간이 지나도 마음속에서 다시 살아난다. 자연 속에 서면 삶과 죽음의 경계가 더욱 고요하게 느껴진다.
믿음 안에서 죽음은 모든 것을 끝내는 벽이 아니다. 먼저 떠난 이들이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는 소망은 이별의 슬픔을 영원의 빛으로 감싸 준다. 호수의 수면 위로 비친 햇빛처럼, 이 땅의 기억은 영원한 나라를 향한 그리움으로 바뀐다.
그러나 아름다운 풍경 뒤에는 이 땅의 불안한 현실도 놓여 있다. 시애틀 지역은 캐스케이드 섭입대와 태평양 연안의 지질 구조로 인해 지진의 위험을 안고 있다. 언제 닥칠지 모르는 거대한 재난의 가능성 속에서도 사람들은 오늘을 살아간다. 일하고, 사랑하고, 자녀를 키우며, 내일을 준비한다.
그 사실은 인간의 삶이 얼마나 유한한지를 일깨운다. 우리는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한순간에 흔들릴 수 있는 땅 위에 살아간다. 그러므로 오늘의 평안은 당연한 권리가 아니라 은혜다. 가족과 벗이 곁에 있고, 함께 식사하며, 물결을 바라보고, 지나온 시간을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서 베푸신 선물이다.

연어처럼 본향을 향하여
레이크 워싱턴의 물길은 또한 생명의 길을 보여 준다. 호수와 퓨젓사운드를 연결하는 수문은 높이가 다른 물길을 조절하여 배들이 오갈 수 있도록 한다. 그 곁에는 바다에서 돌아온 연어가 상류로 올라갈 수 있는 통로도 마련되어 있다.
거친 바다를 헤치고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연어의 모습은 깊은 감동을 준다. 연어는 멀고 험한 길을 지나 자신이 태어난 곳으로 돌아간다. 물살을 거슬러 오르고, 장애물을 넘으며, 끝내 생명의 근원에 이른다. 그 모습은 세상의 흐름에 휩쓸리지 않고 하나님께서 부르신 길을 걸어가는 믿음의 사람을 닮았다.
신앙의 길도 순탄하지만은 않다. 때로는 물살이 거세고 앞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많다. 그러나 소명을 잃지 않는 사람은 다시 방향을 잡고 본향을 향해 나아간다. 우리의 인생도 결국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여정이다.
시애틀은 아마존과 마이크로소프트, 보잉과 블루 오리진 같은 혁신의 기업들이 자리한 도시다. 스타벅스의 첫 매장이 시작된 곳이며, 코스트코가 성장한 지역이기도 하다. 첨단 기술과 상업의 활력이 도시 곳곳에 흐른다. 그러나 그 모든 분주함 한가운데에 레이크 워싱턴과 같은 고요한 호수가 있다는 사실이 특별하게 다가온다.
현대 문명은 사람에게 더 빠르게 살라고 재촉하지만, 호수는 잠시 멈추어 깊이 바라보라고 말한다. 더 많이 소유하는 것보다 지금 곁에 있는 사람을 귀히 여기라고 말한다. 성취의 높이보다 삶의 깊이를 돌아보라고 말한다.
레이크 워싱턴의 하루는 물결 위에 잠시 머물다 사라지는 빛과 같았다. 그러나 그 빛이 남긴 묵상은 오래 마음에 머문다. 오늘도 여기까지 인도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며, 남은 길도 마침내 하나님의 품으로 인도하실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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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준모 목사
정준모 목사
철학박사 및 선교학박사 Ph.D & D. Miss, 목사, 교수, 저술가 및 상담가, 말씀제일교회 담임 목사, 전 총신대 · 대신대 · 백석대 교수역임, CTS TV 대표이사 및 기독신문 발행인, 세계선교회 총재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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