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합과 치유”강조 미국 46대 대통령 당선인 바이든



바이든(Joseph Robinette Biden Jr.)은 1942년 11월 20일 펜실베니아주 스크랜턴의 아일랜드계 집안에서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바이든이 태어났을 때 외가에 얹혀살 정도로 가난했지만 10살 때 온 가족이 델라웨어로 이주하고 아버지의 중고차 판매도 형편이 좋아져 중산층으로 안정된 삶을 살아간다. 알콜중독이었던 아버지 때문에 바이든은 술과 담배는 전혀 입에 대지도 않았다고 한다. 이때의 고생은 가족 사이에 결속을 다지는 계기가 됐다고 자서전에 밝힌 바 있다.
어린 시절 바이든은 말더듬 증상이 있어 자주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았다. 하루는 학교 수업 시간에 교사에게 심한 모욕을 받고 그 자리에서 집으로 돌아왔는데, 이를 본 어머니는 바로 학교로 달려가 교장과 교사를 찾아 “또 한 번 내 아들에게 그런 식으로 말하면, 모자를 벗겨 갈기갈기 찢어 버리겠다”고 말하고 바이든에게 교실로 돌아가라고 했다.
이때 바이든에게 세살 어린 여동생 벨러리가 있었는데 밸러리는 바이든의 말더듬을 고쳐주려고 항상 옆에서 들어주고 응원을 아끼지 않았다. 훗날 여동생 밸러리는 바이든의 모든 선거캠프에서 참모역할을 하며 그를 도왔으며, 결국 대통령 당선까지 만들어 내는 숨은 조력자로 변신한다.
1965년 델라웨어 대학교에서 학사 학위를, 1968년 뉴욕 시러큐스 대학교에서 법학 학위를 받았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네일리아와 결혼해 세 아이를 낳았다. 사실 바이든의 학교 성적은 뛰어나지 않았다.
델라웨어 대학교를 졸업할 때 평균 C 학점에 등수도 하위권이었다. 하지만 로스쿨 진학을 위해 심사한 교수들은 학업성적 보다 바이든의 높은 포부와 비전에 입학 허가를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바이든은 로스쿨 역시 하위권으로 졸업을 한다.
바이든은 학교 졸업 후 변호사로 일하다가 1970년 뉴캐슬 카운티 의원으로 출마 권유를 받는다. 당시 그 지역은 공화당의 주 장악지역이었지만, 아슬아슬하게 당선해 민주당 의원으로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다. 1972년 공화당 강세지역인 델라웨어에서 3선 현역 의원에 도전장을 내밀어, 나이 서른에 최연소 상원의원직을 차지한다.
하지만 당선 한 달 후인 1972년 12월 18일 교통사고로 부인 네일리아와 딸 나오미가 숨지고 중상을 당한 장남 보와 차남 헌터를 돌보며, 병원에서 취임 선서를 한다. 이때부터 바이든은 엄마를 잃은 아들들을 보살피기 위해 매일 175km가 떨어진 워싱턴DC로 출퇴근을 했다.
1977년 현재의 아내인 질 바이든과 재혼하기 전까지 아이들을 혼자 키웠다. 질 바이든 역시 재혼이며, 1981년 딸 애슐리를 낳는다.
상원의원에 계속 당선되어 2008년까지 35년간 6선 의원으로 활동하며 대표적인 상원 거물이 된다. 특히 외교위원회와 법사위원회에서 외교, 국방, 법률 분야의 전문가로 평가받는다.
바이든은 1988년과 2008년 민주당 대권 후보로 경선에 나선 바 있지만, 일찍 포기선언을 했다. 하지만 2008년 버락 오바마는 부통령 러닝메이트로 바이든을 지목한다.
오바마에게 그는 풍부한 외교, 국방 분야와 경합 주의 노동자와 백인 중산층에 대한 지지를 얻기 위해 꼭 필요한 사람이었다. 바이든은 과거 제조업 공업지대인 러스트벨트를 돌며 당선에 큰 몫을 하고 부통령으로 취임한다.
2012년도 오바마 대통령과 재선에 성공하게 된다. 하지만 2015년 또다시 시련이 찾아온다. 이라크전 참전용사로 델라웨어주 법무 장관을 지낸 큰아들 보 바이든이 뇌종양으로 46세 젊은 나이에 사망한다. 보 입원 당시 부통령이었던 조 바이든은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으며 집을 팔려고 한다고 대통령에게 말했다가 오바마는 집은 절대 팔지 말라고 말하며, 병원비와 생활비를 위해 돈을 빌려준다고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큰아들의 사망은 2016년 민주당 대통령 경선에 출마를 포기하게 만든다. 오바마 대통령은 2017년 퇴임을 앞둔 바이든 부통령에게 자유의 메달을 깜짝 수여 했고, 바이든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2017년 부통령직을 내려놓고 바이든은 펜실베니아 대학교에서 정치학 교수로 재직하다, 2019년 4월 대선 세 번째 출마를 선언한다.
올래 8월 민주당 대선 후보로 공식 지명된 후 해리스를 부통령 러닝메이트로 지목한고 트럼프 현 대통령을 상대로 본격적인 선거전에 돌입해 11월 3일 총선거를 거쳐 대통령 당선이 확정되었다.
주요 공약으로 법인세를 현행 21%에서 28%로 인상, 추방유예 프로그램 지원, 최저임금 15달러 인상, 오바마케어 부활, 친환경 기후변화 대응 등 이 있다.
한반도 정책으로 오바마 행정부처럼 북한이 비핵화로 가지 않는 한 제재를 지속하고 미군 감축을 반대하고 있다. 1981년 김대중 전 대통령이 미국에 망명했을 때 만나 친분이 있으며, 2001년에는 한국을 방문해 김 대통령과 넥타이를 교환하면 우정을 쌓기도 했다. 평소 북한에 대해 햇볕정책을 주장해온 김대중 대통령을 존경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는 평범한 중산층에서 태어나 이른 나이에 정계에 입문하여 대통령에 올랐다. 지난주 연설에서 미국인들에게 화합의 메시지를 보냈는데, 민주당이든 공화당이든 상대방을 적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며, 트럼프 대통령 지지자들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한다고 밝히며 모든 미국인이 함께 협력하여 모든 갈등과 분열을 치유하고 위대한 미국을 만들어나가자고 역설했다.
· 최초의 여성 부통령 카말라 해리스



카말라 데비 해리스(Kamala Devi Harris/56세)는 미국의 첫 여성 부통령 당선인이자 미국 역사상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를 선출직 아프리카, 아시아계 미국인이다.
해리스는 1964년 10월 20일 캘리포니아 오클랜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도널드 해리스(Donald J. Harris)는 자메이카 출신으로 스탠퍼드대 경제학 교수를 지냈고, 어머니 샤말라 고팔란(Shyamala Gopalan)은 인도 타말 출신으로 버클리에서 공부한 유방암 전문가다. 하지만 해리스가 일곱살 때 부모가 이혼하면서 어머니 영향아래 성장했다. 12살 때에는 여동생과 함께 어머니를 따라 캐나다 퀘벡으로 이주해 고등학교까지 마친 후 미국으로 돌아와 1986년 워싱턴 D.C에 있는 하워드대에서 정치학과 경제학을 공부하고, 1989년 캘리포니아 헤이스팅스에서 로스쿨 법학 학위를 취득했다.
하워드대 시절 학생회 대표로 흑인 인권 운동에 열성적으로 참여했는데 훗날 이때의 기억이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1990년부터 지방 검찰청에서 일하며 갱단 폭력, 마약 밀매, 성추행 등의 사건을 기소하면서 강인하다는 평판을 얻었다. 2004년부터 7년동안 검사장을 지냈고, 2011년 흑인 여성으로는 최초로 캘리포니아 법무장관에 올랐다.
소개팅에서 만난 든든한 조력자 유대계 변호사 더글러스 엠호프와 2014년 결혼한다. 해리스는 초혼이지만 남편은 재혼이다. 현재 남편의 전처 사이에 낳은 2명의 성인자녀가 있다.
2016년 이민법과 형사법 개혁, 최저임금 인상, 여성 권리 보호를 주장하며 캘리포니아 대표 연방 상원직에 도전해 같은 민주당 소속 현역 하원의원을 당당히 누르고 당선해 현재까지 연방 상원 의원직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2019년에 대권에 꿈을 품고 본격적으로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 공식 출마한다.
경선 후보 중 유일하게 흑인 여성이지만 TV토론 당시 바이든을 버니 샌더스,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 등 쟁쟁한 경선 후보들 앞에서강하게 밀어붙여 주목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선거자금이 모자라 작년 12월 중도 하차 선언을 하고 바이든을 지지한다.
이후 2020년 8월 11일 뜻밖에 바이든의 러닝메이트로 발표되었다. 바이든이 해리스를 부통령 후보로 내정하기까지 그동안의 능력을 높이 샀기 때문이다.
바이든은 해리스가 자신의 부통령으로 필요한 자력을 모두 갖췄다고 평가했다. 또한 평소 트럼프 행정부에 대한 수위 높은 공격과 비판은 선거캠프에서 필요한 충분한 자질을 갖추었다고 판단했다.
지난주 해리스 부통령 당선 확실 연설에서 자신이 바이든 행정부의 첫 번째 여성 부통령일지는 모르나 마지막은 아닐것이라고 연설하며 그녀를 보고 있는 모든 여성들에게 희망을 갖을 수 있는 메시지를 전달하기도 했다.
사실 바이든 당선인은 얼마전에 작고한 고 이건희 회장과 같은 1942년생 임을 고려하면 대통령의 건강에 문제가 생길경우 헌법에 따라 부통령이 권한을 대행하게 된다. 거기에 바이든은 4년 후 재선에 도전하지 않을 것을 여러차례 내비쳐 해리스의 역할이 기존의 부통령들보다 더 커질수 있다.
내년 1월 20일 부통령에 임명되면 해리스는 먼저 코로나로 영향을 받은 경제를 회생시키기 위한 법안 통과와 올해 미국 사회를 달군 뿌리깊은 인종차별 철폐를 위해 할일이 많다. 바이든을 도와 바로 앞으로 다가온 정권 인수를 위한 작업부터 차근 차근 풀어나가는 그녀의 사회 정의 개혁을 위한 당찬 행보가 주목된다.
· 콜로라도 연방 상원의원 당선인 히켄루퍼



히켄루퍼(John Wright Hickenlooper Jr./68세)는 1952년 2월 7일 펜실베니아 주 필라델피아 외곽 중산층 지역인 나버스에서 태어났다. 앤 도우텐 케네디와 존 라이트 히켄루퍼사이에서 태어났지만 8살 때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머니 밑에서 홀로 자랐다.
1974년 웨슬리언 대학에서 영어학사, 1980년 지질학석사 학위를 받고, 그해 콜로라도 버크혼 석유회사에서 지질학자로 근무하다 회사가 벅혼에 매각되자 1986년 정리해고를 당했다. 1988년 가족과 지인의 도움으로 대출을 받아 1988년 덴버에 윈코프 브루잉 컴퍼니(Wynkoop Brewing Company)를 공동 설립해 사업에 전념하기 시작한다.
그는 콜로라도에서 지질학자로 시작했지만, 덴버 다운타운 외곽 창고지역에 양조장과 식당을 여러 개 차려 획기적인 사업가로서 성공한 후 정계로 뛰어든다. 살아오면서 학생회 선거에도 나가지 않았던 사람이었지만, 2003년 마일하이 이름 사용권과 덴버시 취약계층 노숙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50을 넘긴 나이에 출마해 43대 덴버 시장으로 선출된다.
시장에 당선된 히켄루퍼는 대중교통 프로젝트, 장학재단 설립, 노숙자를 위한 주택 건설 등 야심 찬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했다. 타임스지는 2005년 ‘최고의 5대 도시 시장’으로 히켄루퍼 덴버 시장을 뽑기도 했으며, 그후 인기는 점점 높아져 다시 재선을 거쳐 2011년까지 성공적으로 덴버 시장직을 완수한다.
그의 위기 때마다 발휘한 뛰어난 리더십은 콜로라도 주민들에게 인정받아 2010년까지만 해도 민주당이 약세였던 콜로라도에서 압도적인 표 차로 주지사에 당선된다. 2011년 주지사에 취임해 40위의 콜로라도 일자리 창출분야를 1위로 만들었으며, 기후변화, 의료혜택 확대, 총기안전 강화 분야에 힘쓰며 2019년까지 8년 동안 콜로라도를 발전시켰다.
주지사 임기가 끝나자 2019년 미국 대통령 후보로 민주당에서 공천을 받으려 했으나 포기하고, 작년 8월 코리 가드너 미국 상원의원에 도전 선언 후 지난주 치러진 11월 3일 총선거에서 9% 표 차로 승리했다.
지난 9월에는 오로라 소재 한인 마트를 찾아 한인들의 고충을 나누기도 했으며, 콜로라도 한인 신문 중 유일하게 경선과 본선에 콜로라도 타임즈에 선거 광고를 게재하기도 했다. 공약으로 의료 제도 및 기후변화 개선, 소상공인 지원, 총기규제, 이민 개혁 등이 있다. 히켄루퍼는 2016년 언론사 임원 프링글과 재혼했으며, 첫 부인 헬렌 소프 사이에서 낳은 17세 아들 테디가 있다. 취임식은 2021년 1월 3일 예정이다.
앞으로 콜로라도를 대표하는 히켄루퍼 상원의원의 내세운 공약과 콜로라도에 필요한 정책 수립 및 지원을 더욱 더 빠르고 확실하게 워싱턴에 피력하여 변화를 이끌어내는 활약을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