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의 하늘은 청명했다. 딸은 골프, 아들은 테니스, 남편은 일… 늘 바쁘게 종종거리는 쳇바퀴 같은 생활 속에서 모처럼 주말에 온 가족이 집에 있었고, 나는 그 시간을 그냥 흘려버리는 것이 아깝게 느껴졌다.
침대에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빈둥거리는 아이들을 채근해 차에 실었다. 남편도 딸려왔다. 나는 예전부터 한번은 가보고 싶었던 장소로 거침없이 차를 몰았다.
콜로라도 스프링스 인근에 있는 페인트 마인스 인터프리티브 공원(Paint Mines Interpretive Park)은 이름 그대로 마치 페인트를 뿌려놓은 것 같은 바위들의 향연이다. 우연히 구글에서 처음 마주한 그 곳은 마치 지구가 아닌 다른 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붉은 색, 푸른색, 흰색, 노란색, 보라색, 회색의 바위들…. 빛에 따라 오묘하게 달라지는 그 색깔을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다. 그래서 무작정 그 곳을 찾아갔다.
공원은 캘헌(Calhan)이라는 타운에 있으며, 콜로라도 스프링스에서 동쪽으로 30마일 정도로 멀지 않아, 덴버에서 한시간 반 정도만 운전하면 쉽게 닿을 수 있는 곳에 위치해 있었다. 그렇게 문명에 가까운 곳에, 그렇게 비현실적인 풍경이 펼쳐질 것이라고는 상상이 되지 않았다. 공원에 들어서자 붉은 빛이 감도는 분홍색과 노란색, 흰색의 바위들이 마치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었다.
어떤 곳은 마치 붉은 팥고물이 뚝뚝 떨어져 내리는 시루떡 같았고, 어떤 곳은 달콤한 딸기쨈이 수줍게 모습을 드러낸 케잌 조각이나 크림이 흘러내리는 번트 케잌을 닮았다. 눈부신 하얀 바위는 마치 곱게 체를 쳐서 내린 밀가루들로 부드럽게 빚어낸 헨젤과 그레텔의 과자의 집을 떠올렸다. 켜켜이 쌓인 “후두(Hoodoo)”라고 불리우는 바위들은 버섯모양, 첨탑모양, 나선모양 등 다양한 자태를 뽑내고 있었고, 황량한 화성의 풍경처럼 풀 한 포기 없이 펼쳐진 바위산의 모습은 비정상적으로 뒤틀리고 형이상학적으로 형태를 만들어낸 피카소의 그림에 르누아르의 파스텔톤 색감을 입힌 것 같기도 했다.
바위는 모래로 이루어진 사암이었다. 거친 알갱이의 모래보다는 오히려 부드러운 밀가루에 가까운 모래. 그 모래에 산화된 철성분이 가미되어 다양한 색을 만들어냈다. 모래가 쌓여 바위가 되는 시점에 얼마만큼의 산화가 진행되는가에 따라 색깔이 달라졌다. 수십만년동안 조금씩 형성된 바위들은 그렇게 제각각 예쁜 옷을 걸쳐 입었다.
이 멋진 형형색색의 바위들에 인간의 손길이 닿기 시작한 것은 9,000년 전이었다. 미국 원주민 인디언들은 다양한 색의 바위를 긁어 페인트 물감을 만들었고, 이를 이용해 벽화 같은 예술의 흔적을 남겼다. 9,000년전, 그 까마득한 과거에도 페인트 마인스의 신비로운 각양각색 바위들은 햇살에 창연히 빛났을 것이고, 인디언들을 매혹시켰을 것이다.
아무것도 없는 평야와 초원 가운데 오롯이 자리잡은 페인트 마인스를 인디언들은 어떻게 찾아냈을까? 저 부드러운 바위의 표면을 긁어내서 원하는 색감을 얻어낼 수 있다는 생각은 어떻게 하게 된 것일까? 마치 거대한 구덩이 속으로 깊숙이 파고든 듯한 저 색색의 바위들을 통해 인디언들은 어떤 영감을 받아 얼마나 멋진 작품들을 만들어냈을까? 원하는 색을 얻기 위해 인디언들은 얼마나 열심히 바위들을 파내려갔을까?
정오의 태양이 머리 위에 내려앉았다. 나는 고개를 들어 푸른 하늘을 바라보았다. 흰 구름 몇조각이 무심하게 흘러가고 있었고, 태양은 눈이 부셨다. 아찔했다. 어디선가 딱딱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구릿빛 피부를 가진 원주민 인디언 청년이 도구를 이용해 붉은색 바위 조각을 깨고 있었다. 어린 아이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열손가락 가득 물감을 머금은 아이가 바위에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있는 아빠로 보이는 남자 옆에서 물감으로 장난을 치고 있었다. 나는 눈을 깜빡였다. 아이의 웃음소리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구릿빛 인디언 청년의 모습도 간곳 없었다. 어슬렁거리며 바위들을 구경하는 내 아이들의 모습만이 내 눈앞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페인트 마인스 공원 자체는 750 에이커 정도이고, 걸어서 구경할 수 있는 트레일은 루프 형태로 총 길이는 3.5마일로 그리 길지 않다. 트레일을 산책하는 것은 험하지 않고 경사도 완만해 크게 힘들지 않지만, 스펙타클하다기 보다는 오히려 평범한 초원 풍경들이 이어진다.
흔한 풍경들 속에서 돋보이듯 도드라진 페인트 마인스의 바위들은 그래서 더 특별하다. 동틀 무렵 해가 서서히 올라오기 시작하면 페인트 마인스는 파티를 시작한다. 타고난 색은 그대로이건만, 태양이 서쪽으로 이동하면서 형형색색의 바위들과 눈을 마주치면 서로를 희롱이라도 하듯 바위는 미묘하게 색을 달리한다. 캄보디아 앙코르와트의 바이런 사원이 빛의 방향에 따라 미소를 조금씩 달리하듯이, 바위는 그렇게 태양과의 탱고를 통해 시시각각 팔색조의 매력을 뽐낸다.
페인트 마인스를 뒤로 한 채 차가 천천히 공원을 빠져나간다. 내 눈속에 마지막으로 담긴 바위들은 푸르스름한 빛으로 우리를 배웅하고 있었다. 바위들은 푸른색 꿈을 꾸고 있었다. 수천년간 이어진 그 긴 꿈속을 함께 한참을 거닐다가 빠져나온 느낌이다. 넘실거리는 푸른 파도같은 아득한 꿈속의 장막을 지나 현실로 돌아왔지만 머릿속은 여전히 푸른 꿈속을 허우적대고 있었다.
나는 요즘도 가끔 그 바위들을 꿈꾼다. 아득한 내 기억의 저편에서부터 나는 저 바위들을 사랑했던 것은 아닐까.
케이트 정 (Kate Jung)
[콜로라도 타임즈 여행수기 공모전 대상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