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서 변화는 일상이다.
몸속의 세포는 죽고 태어나기를 매일 매순간 반복하고 있어 겉으로는 어제의 몸과 오늘의 몸이 그대로인 듯 여겨지나 매일이 다르고 매시간 매초마다 다르다. 몸 뿐 아니라 생각도 느낌도 기분도 순식간에 바뀌고 바뀐다.
우리 인간의 뇌에서는 하루에 오만번의 생각이 일어났다 사라진다고 뇌과학자들은 말한다. 오만 가지 잡생각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게 아니었구나 싶어 놀랍다. 거기다가 오만상을 찡그리고 궁상을 떤다는 말도 있다.얼굴표정은 생각에 따라 변하니 하루에 오만상을 만들어 짓는다고 해도 맞는 말이 된다. 명상수행과 기도생활을 오래도록 해와서 생각 잠재우기에 능통하신 신부
님과 목사님, 스님들과 명상가들의 얼굴표정이 편안하고 한결같은 이유가 그 때문인가 보다. 거기에 더 보태어 지그시 뜬 듯 감은 듯한 눈매에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부처상은 볼때마다 위안과 위로를 준다. 안다 안다 다 안다… 혹은, 오직 모를 뿐이로다…하는 놓여남의 안도감으로도 보인다.
생각은 느닷없이 부지불식간에 일어난다. 텅 빔 속에서 어떤 존재가 속삭이듯이 또는 홀로그램처럼 갑자기 대상이 나타나고 장면이 연출된다. 속삭이는 그것은 나인가 내가 아닌가. 부정적인 생각이라 안하려고해도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안좋은 생각은 이어진다.
생각은 내 맘대로 안되니 내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뇌 속 해마에 저장된 과거의 사건들과 장면 및 영상들이 현실에서 연결고리가 생길때면 저절로 툭 튀어나온다고 한다. 저장된 기억들이란 것은 있는 그대로가 아니고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을 보는데다가 자기 식으로 해석되어져서 저장되기때문에 여러 사람이 같은 곳에서 같은 것을 보고 듣고 먹고 냄새 맡았어도 나중에 물어보면 각
자 다른 이야기를 하니 어떤 것이 사실이고 진실이라 단정 할 수 없다.
한 생각이 일어날 때 그것을 감지하고 그 일어난 생각을 가만히 바라다보면 신기하게도 그 생각은 사라진다. 그래도 사라지지 않으면 그 생각에다 대고 이렇게 말을 하는 것이다. 이 생각이 사실인지 아닌지 나는 모른다라고. 그러면 그 생각에서 바로 놓여난다. 그리고 어떤 걱정이 일어나면 그 걱정에다 대고 또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이 일이 일어날지 안 일어날지 나는 모른다라고. 그러면 신기하게도 그 걱정에서 바로 놓여난다.
이것은 무척 논리적이고 깔끔하고 효과적인 서구인들의 인지행동치료법이다. 한편으론 불교의 마음공부와 일맥상통하니 불교는 과학이다. 억겁의 세월 속에 수없이 반복된 생 속에서 얻어진 카르마(업) 또는 순수에너지가 다르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전생이 있었는지 후생이 있을지 없을지 우린 모른다. 전생이고 후생이고 다 우리의 생각 속에 있는 것이지 실제적으로 우리 모두는 현생을 지금 이렇게 겪고 느끼고 있을 뿐 과거도 그때는 지금이었고 미래도 지금일 것이다.
잠이 들면 꿈을 꾼다. 꿈속에서는 그것이 생생한 실제처럼 여겨져서 행복하고 즐겁거나 슬프고 괴롭다. 잠에서 깨어나면 더 이상 꿈속의 행복도 고통도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듯이 삶이라는 꿈에서 깨어나면 삶에서의 행복도 고통도 한 바탕 꿈으로 여겨지리라. 일장춘몽. 한 편의 긴 보름날의 꿈. 이런 생각도 해본다. 잠들면 꾸어지는 꿈이 사실인데 꿈속의 내가 잠이 들 때
마다 꾸는 꿈이 이편에서는 이게 진짜 삶이라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곳에서의 삶이 끝나면 육신은 흙으로 돌아가거나 한 줌의 재가 되어 바람과 함께 사라져 갈테지만 순수의식은 그 왔던 곳으로 혹은 어느 시공간으로 존재함을 계속해 나가리라는 강한 느낌.
인간을 비롯한 동식물 모두 자신들의 씨앗을 계속 퍼뜨리고 양육하고 잘 양육되어지게 온갖 노력을 다 한다. 그들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이끄는 그것이 무엇일까? 생각해보면 이런 답도 유출된다. 순수에너지 역시 영속된 존재함의 본능을 이어갈 것이라는, 소멸이란 없다는.
예수님의 가르침도 부처님의 가르침과 같다. 예수님의사후 한참 뒤에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그동안 몹시 박해받아 오던 그리스도교가 로마 국교로 되었고 종교회의에 의해 성경이 완결지어 졌다. 그런데 종교회의에서 발탁된 여러 가지 자료들 중에서 그들의 목적에 적합하지 않는 45권의 책들은 삭제했으며 이런 책들은 사회적으로 통용될까 두려워 아예 없애 버렸다. 신약성서의
많은 부분이 당대의 구미에 맞게 둔갑을 했고, 예수님의신분이 격상되어 기록되었다. 지금의 신약성경은 4세기때의 작가와 편집자들이 만들어 낸 작품이다. 허나 읽다보면 불경이나 성경이나 같은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해는 떴다가 지며 그 떴던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이키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어느 곳
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 이미 있던 것이 훗날에 다시 있을 것이며, 이미 일어났던 일이 훗날에 다시 일어날 것이다.
이 세상에 새 것이란 없다. 색즉시공 공즉시생 수상행식 역부역시 사리자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물질은 텅 빔과 다르지 않고 텅 빔은 물질과 다르지 않다. 물질은 그대로 텅 빔이며 텅 빔은 그대로 물질이다. 느낌도 생각도 행동도 의식도 다 텅 빔이다.
이처럼 온갖 존재는 텅 빔으로 있으니 태어나지도 사라지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않으며 늘거나 줄지도 않는다.
할렐루야 아멘. 나무 관세음보살.
-권달래 작가-
아마추어 작가
1985 중앙대
건축공학과 졸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