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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로라도 8월의 역사] 전차가 멈추자 덴버가 폭발했다…1920년 ‘피의 파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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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후 물가 폭등과 임금 삭감이 발단…시민 7명 사망·50명 이상 부상

1920년 8월 1일 새벽, 덴버 전차 노동자들이 압도적인 찬성으로 파업에 돌입했다. 임금 삭감을 막기 위해 시작한 파업은 불과 며칠 만에 전차 전복과 방화, 총격으로 이어졌다. 시민 7명이 숨지고 50명 이상이 다쳤으며 사태를 진압하기 위해 연방군까지 투입됐다.

파업의 배경에는 제1차 세계대전 직후 미국을 휩쓴 경제 혼란이 있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물자 부족과 생산비 상승이 이어지면서 물가는 가파르게 올랐다. 미 노동통계국에 따르면 미국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1920년 6월 전년 대비 23.7%에 달했다. 식료품 가격은 1913년부터 1920년 사이 두 배 이상 상승했다.

미국 경제는 1920년 초 경기후퇴에도 들어갔다. 이는 1929년 시작된 대공황과는 다른 경기침체였지만 생산 감소와 실업 증가가 나타난 심각한 불황이었다. 높은 생활비가 계속되는 상황에서 해고와 임금 삭감의 불안까지 겹친 것이다.

같은 시기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상황도 크게 요동쳤다. 윌슨 대통령이 제시한 민족자결주의는 주로 패전국인 독일·오스트리아·오스만제국의 지배 지역을 대상으로 구상됐으며, 승전국 일본의 식민지였던 한국에는 적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원칙은 한국 독립운동가들에게 새로운 국제질서에 대한 기대를 심어주며 2·8독립선언과 3·1운동에 중요한 자극을 줬다.

반면 일본은 연합국 편에 선 승전국으로 영국과 러시아 등에 무기와 군수품, 선박을 공급했다. 전쟁으로 유럽산 제품의 아시아 공급이 줄어들자 일본은 섬유와 공산품 수출을 확대하고 중화학공업을 성장시키며 전쟁 특수를 누렸다.

일본은 전쟁 중 독일이 지배하던 중국 산둥반도의 자오저우만 조차지와 철도 이권도 장악했다. 베르사유조약은 독일의 산둥 권익을 일본에 넘겼고 이는 중국에서 거센 반발을 불러왔다. 옛 독일 조차지와 철도에 대한 통제권은 1922년 산둥조약에 따라 중국에 반환됐다. 같은 전쟁이 한국에는 독립의 희망과 좌절을, 일본에는 경제 성장과 제국주의적 팽창의 기회를 가져온 셈이다.

덴버 시민들의 생활도 전쟁 후 물가 상승의 영향을 받았다. 콜로라도 백과사전에 따르면 당시 덴버에서는 식료품 가격이 41%, 임대료가 19%, 의류비가 60% 올랐다. 임금이 소폭 인상돼도 실제로 살 수 있는 물건은 오히려 줄어드는 상황이었다.

당시 덴버의 주요 대중교통은 덴버 트램웨이(Denver Tramway)가 운행하는 전차였다. 그러나 전차 요금은 1906년 체결된 프랜차이즈 계약에 따라 5센트로 묶여 있었다. 회사는 인건비와 운영비가 올랐다며 요금 인상을 요구했지만 시민과 덴버시는 반대했다.

회사는 1919년부터 직원을 해고하고 운행을 줄였으며 임금도 삭감했다. 1918년 노동조합 로컬 746을 결성해 8시간 노동제와 임금 인상을 얻어냈던 노동자들은 추가 삭감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맞섰다.

경제적 갈등에는 노동조합에 대한 사회적 불신도 더해졌다. 러시아혁명과 미국 각지의 노동 분쟁 이후 기업과 중산층 사이에서는 노동운동을 급진주의와 연결해 바라보는 ‘적색공포’가 확산했다. 임금 협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사회질서와 권력을 둘러싼 대립으로 확대될 수 있는 분위기였다.

전차 노동조합은 1920년 8월 1일 오전 5시 30분 파업 여부를 표결했다. 결과는 찬성 887표, 반대 11표였다. 법원의 파업금지 명령에도 노동자들이 작업장을 떠나면서 덴버의 전차 운행은 사실상 중단됐다.

회사는 파업 진압 전문가로 알려진 존 ‘블랙 잭’ 제롬을 고용하고 다른 지역에서 파업대체인력을 데려왔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무장했고 일부는 특별경찰 권한까지 부여받았다.

8월 4일 파업대체인력이 운행한 첫 전차가 거리에서 뒤집혔다. 이튿날에는 회사를 지지하는 논조를 보인 덴버포스트 건물이 공격받았고, 트램웨이 건물과 유니언스테이션을 비롯한 도심 곳곳에서 충돌이 벌어졌다. 이날 2명이 숨졌다.

8월 6일 이스트 디비전 전차 차고지 주변에서 상황은 더욱 악화했다. 파업대체인력이 군중을 향해 총을 쏘면서 5명이 추가로 숨졌다. 며칠 동안 이어진 폭력사태로 7명이 숨지고 50명 이상이 다쳤다. 역사자료에 따르면 사망자 7명은 모두 파업에 직접 참여하지 않은 시민이었으며, 부상자 중에는 어린이도 있었다.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자 덴버시와 콜로라도주는 연방정부에 병력 투입을 요청했다. 8월 7일 포트 로건에서 출발한 연방군 선발대 250명이 덴버에 도착했고 이후 추가 병력이 배치되면서 폭력사태는 빠르게 진정됐다.

파업은 노동자들의 승리로 끝나지 않았다. 덴버 트램웨이는 이후 파산 절차에 들어갔고 로컬 746도 무너져 1933년까지 다시 조직되지 못했다. 덴버에 온 레너드 우드 미 육군 소장은 파업대체인력을 무장시킨 결정을 사태를 키운 중대한 실책으로 평가했다.

1920년 덴버 전차 파업은 단순한 임금 다툼이 아니었다. 노동자들은 기록적인 물가 상승으로 실질임금이 줄었고 회사는 고정된 요금과 운영비 상승으로 압박받았다. 여기에 경기후퇴와 노동조합에 대한 사회적 공포, 무장 파업대체인력 투입이 겹치면서 노사분쟁은 시민이 희생되는 유혈사태로 변했다.

사건 발생 106년이 지난 지금도 전복된 전차와 거리를 가득 메운 시민들의 사진은 덴버가 겪었던 가장 치명적인 노동 분쟁 가운데 하나를 증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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