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뉴스콜로라도 뉴스 덴버에서 평화를 청한 사진 한 장, 두 달 뒤 샌드크리크의 비극

[콜로라도 역사] 덴버에서 평화를 청한 사진 한 장, 두 달 뒤 샌드크리크의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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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4년 9월 28일, 덴버 외곽의 캠프 웰드(Camp Weld)에 샤이엔족 지도자 블랙 케틀(Black Kettle)이 도착했다. 오늘날 콜로라도의 주도인 덴버가 속한 이 땅은 당시 아직 ‘콜로라도 준주’였다. 함께 온 샤이엔·아라파호 지도자들은 준주 주지사 존 에번스(John Evans)와 군 지휘관 존 치빙턴(John Chivington)을 만나 평화를 구했다. 그날 찍힌 사진에는 파이프를 들고 앉은 블랙 케틀이 남아 있다.

두 부족은 덴버 일대와 동부 평원을 삶의 터전으로 삼았다. 미국 정부도 1851년 포트 라라미 조약(Treaty of Fort Laramie)에서 콜로라도 동부를 포함한 넓은 지역을 이들의 영토로 인정했다. 그러나 덴버 부근에서 금이 발견되자 이주민들이 몰려왔고, 1861년 포트 와이즈 조약(Treaty of Fort Wise)은 부족의 땅을 크게 줄였다. 일부 지도자만 서명한 이 조약을 다른 이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갈등에는 토지를 이해하는 방식도 있었다. 샤이엔의 전통에서 땅은 조상의 기억과 의례가 깃든 공동체의 터전이었다. 부족마다 자기 영토를 지키고 사냥하며 이동했으므로, 이를 주인 없는 공유지로 볼 수는 없다. 반면 미국의 토지 제도는 경계를 정하고 땅을 개인에게 분배하거나 정착민에게 넘기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약속된 영토에 정착민이 들어오면서 갈등은 깊어졌다.

1864년 봄과 여름에는 군의 샤이엔 마을 공격과 뒤이은 보복, 이주민 가족 살해 사건이 겹치며 공포가 커졌다. 블랙 케틀은 포트 라이언(Fort Lyon)의 에드워드 윈쿱(Edward Wynkoop) 소령에게 평화 협상을 요청했고, 백인 어린이 포로 네 명을 돌려보내기로 했다. 캠프 웰드에서 그는 사람들이 안심하고 잠들 수 있도록 평화를 원한다고 말했다. 회담에는 통역사 존 스미스(John Smith)가 있었다.

그러나 회담은 안전을 보장하지 못했다. 치빙턴은 평화를 원하면 포트 라이언의 군 지휘부를 찾아가라고 했다. 이후 샤이엔·아라파호 주민들은 샌드크리크(Sand Creek)에 모였다. 현재 덴버에서 남동쪽으로 약 170마일(약 274㎞) 떨어진 평원이다. 11월 29일 새벽, 치빙턴이 이끄는 콜로라도 의용 기병대가 그 마을을 기습했다. 미국 국립공원관리청에 따르면 230명이 넘는 주민이 숨졌으며, 상당수가 여성과 어린이, 노인이었다. 이는 단순한 의사소통 실패로 설명할 수 없는 공격이었다.

당시 조선에서는 어린 고종이 왕위에 오른 뒤 대왕대비의 수렴청정 아래 흥선대원군이 국정을 이끌고 있었다. 같은 1864년, 동학을 창시한 최제우가 처형됐다. 서로 연결된 사건은 아니지만, 두 지역 모두 격변의 시기였음을 보여준다. 한편 에번스의 이름을 딴 콜로라도의 산 ‘마운트 에번스(Mount Evans)’는 샌드크리크 학살과 그의 연관성을 둘러싼 문제 제기 끝에 2023년 ‘마운트 블루 스카이(Mount Blue Sky)’로 공식 개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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