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님이 사신 자취에로의 부르심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고난에로의 부르심이라는 사실이다. 물론 주님의 제자로 부르심이 항상 고난의 길만 간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또한 고난 그 자체를 찬양하는 고행주의가 곧 기독교라는 말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주님의 가신 길이 세상과는 달리 좁은 길이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길이기에 고난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먼저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신 주님을 생각할 때 우리도 주님을 위하여 기꺼이 고난을 받을 수 있다.
-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받으신 고난이 무엇일까?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받으신 고난은 무엇일까? 그분이 우리의 구주가 되셨다는 그 자체가 바로 고난이요 십자가이다. 그런데 바울은 주님의 고난을 아주 실제적이고 우리가 쉽게 느낄 수 있는 표현을 찾아볼 수 있다.
갈라디아서 3장 12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주님은 우리가 율법을 지키지 못하고 율법의 심판으로 마땅히 십자가에 달려 저주를 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위하여 대신 저주를 받으셔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주님이 우리를 위한 저주를 받으시기까지 하신 고난의 발자취는 오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로 하여금 그분 앞에 엎드려 경배할 수밖에 없고 그분 앞에 겸손할 수밖에 없고 그분을 위하여 그의 제자들은 묵묵히 그분이 가신 발자취를 따라갈 수밖에 없다.
-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 받을 수 있는 고난이 무엇인가?
1) 주의 몸된 교회를 위한 고난이다.
제가 늘 좋아하고 깊게 묵상하는 구절이 있다. 골로새서 1장 24절 말씀이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사도 바울은 그가 복음을 위하여 받는 괴로움, 그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당하는 고통, 이 모든 것을 그리스도께서 이 지상에 그의 제자들에게 남겨 놓으신 고난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 고난을 자신의 육체에 채운다고 표현하고 있다.
무슨 말인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한 고난이 바로 그리스도를 위하여 우리가 받을 수 있는 고난이다. 이 고난은 선택과목이 아니고 필수과목이다. 이 과목은 소극적 자세에서 적극적 자세를 취해야 할 제자의 마땅한 의무이다.
주님이 제자를 구속하기 위하여 저주의 십자가를 지셨듯이 제자 또한 주님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제자가 그가 속해 있는 공동체인 “교회를 위한 고난”이 바로 그리스도의 몸을 위한 고난이란 사실을 성경은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리스도의 몸을 위하여 여러분 얼마나 수고를 많이 하고 있는가? 여러분의 시간을 바친 수고와 섬기고 봉사하기 위한 고통과 고난 그리고 아낌없이 드린 물질, 이 모든 것이 바로 주님의 몸을 위한 헌신임을 믿으시길 바란다.
주님을 위하여 주님 때문에 바친 모든 희생과 봉사와 헌신이 바로 우리가 주를 위해 드릴 수 있는 고난이다.
우리가 목회자로서, 당회원으로서, 제직으로서, 교사로서, 성가 대원으로서, 기도의 용사로서, 구역장과 권찰로서 주님의 지체들과 주님의 제자들을 보살피기 위하여 시간을 소비하고 물질을 드리고 몸을 드리는 이 모든 것이 바로 주님의 남은 고난을 우리의 몸속에 채우는 아름다운 헌신이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 안팎을 보면 그리스도의 몸을 위한 자신인지 자기를 위한 그리스도의 몸을 이용하는지 착각을 하는 자들이 많다.
많은 사람이 주님의 몸인 교회를 배경으로, 노회를 배경으로, 총회를 오히려 자신의 이름을 날리고 자신의 이익을 얻고 자신을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는 몹쓸 자들이 많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참으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여러분의 몸에 기꺼이 고난을 채우기까지 주의 십자가를 짊어지시는 참된 제자가 되기를 바란다.
2) 예수 믿고 예수 이름 때문에 당하는 고난도 있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벧전 4:14).
주님 때문에 핍박을 받고, 주님 이름 때문에 모욕을 당할 수 있다. 그것은 주님의 대적자인 원수 마귀가 항상 겨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는 영위에 하나님의 영광의 영이 늘 함께 하신다.
3) 복음 전하다가 당하는 고난도 있다.
디모데후서 1장 8절에 “그러므로 네가 우리 주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4) 선을 행하다가 받는 고난도 있다.
베드로전서 2장 20-21절에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 왜 고난을 선택과목이 아닌 필수과목으로 주셨을까?
보통 우리는 예수 믿고 따라가는 것은 복 받는 길이라고 말한다. 복 받는 길이기 때문에 고난에서 완전하게 제외되는 특권을 얻은 것처럼 생각한다. 그래서 예수 믿고 주님을 따르면 현실적인 모든 아픔과 고통과 고난이 절대로 침범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결코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가는 길이 만사형통하고 제자의 길에는 비바람도 몰아치지 않고 그들이 탄 배는 노도 광풍과 파도가 치는 법이 없는가? 결코 아니다.
어찌 의인 욥에게 그런 고난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욥같이 좁은 단칸방에 갇혀 하루해가 넘어가는 성도를 본다. 목사로서 심방가서 참 곤란을 당할 때가 많다. 그들에게 “믿으십시오”,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는 말이 진정코 현실적으로 그 사람의 마음에 와닿을 수 있고 위로가 되겠는가?
또한 그런 성도가 당하는 고난과 고통이 복되다고 하는 말을 어떻게 담대하게 자신있게 말할 수 있겠는가?
어찌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고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도다.” 라고 노래할 수 있겠는가?
믿음의 복이 결코 고난을 제거하는 해독제가 아니다. 항상 순탄의 길을 보장하는 보증서가 아니다. 물론 제자가 되는 것이 언제나 고난의 길을 걷고 고통이 떠나지 않고 씨름해야 하고 하나님의 위로와 돌보심이 결코 없다는 말도 아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복과 고난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할까? 제자로서 부르심을 받은 특권과 고난이라는 상관관계를 어떻게 조화를 이룰까? 참으로 어려운 문제다.
그러면서도 너무나 우리가 현실적으로 매일 만나는 문제이다. 그러나 먼저 제자들의 생각이 바뀌어야 한다. 의식이 개혁되어야 한다. 복과 고난이 서로 적대 관계요 서로 배치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복이 있으면 고난이 없고 고난이 있으면 복이 없다는 생각이다. 이것은 바로 세속적이고 샤머니즘적인 복의 개념이다. 성경은 복 속에 고난이 있고 고난 속에 복이 있다고 밝히고 있다. 심지어 최고의 복은 바로 주님을 위한 고난이라고 밝히고 있고 제자의 길은 곧 고난의 길이라고 밝히고 있다.
우리 구약의 믿음의 순례자들을 보자. 히브리서 11장에 수많은 믿음의 선열들이 나온다. 그 중에는 믿음으로 적을 무찔러 승리한 기드온, 삼손, 다윗과 같은 용장도 있다.
또한 반면에 어떤 믿음의 제자들은 믿음을 지니고도 조롱을 받기도 하고 채찍을 맞기도 하고 결박을 당하기도 하고 톱으로 켜이기도 하며 심지어 순교하기까지도 했다.
그러나 그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의 고난을 받은 자들이다. 베드로 사도는 베드로전서 4장 13-14절에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려 함이니라.”
성경은 무작정 고난을 찬미하는 고행 주의를 결코 주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고난 즉 그리스도 때문에 받는 고난,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 그 자체를 복이라고까지 표현하고 있다.
그 고난의 복을 받게 되는 것을 기뻐하고 심지어 즐거워하라고 한 이 역설적인 진리를 우리가 상식으로 절대로 이해될 수 없다.
- 주님이 가신 자취를 따라간 제자들에게 주실 상급은 무엇인가?
1) 참 제자임을 알 수 있는 시금석을 얻게 된다.
마태복음 13장 20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의 씨뿌리는 비유 중에 “네 가지 밭” 이야기가 나온다. 그 중 말씀을 들을 때 즉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환난이나 핍박이 올 때 곧 넘어지는 자라고 하였다.
말씀의 뿌리가 없는 자는 고난이 임하면 곧 도망가 버린다. 고난은 바로 우리가 진정한 제자인가를 알 수 있는 시금석이 된다.
요한복음 15장 19절에는 “너희가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한다.”라고 말씀하셨다.
주님께 속한 자이기에 주님을 싫어하는 세상은 그들이 싫어하는 주님의 제자들을 또한 주님 때문에 싫어하게 된다. 세상이 우리를 미워하고 싫어할 때, 과연 우리가 주님의 제자이다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반가운 소식이다.
2) 주님의 거룩한 성품을 소유하게 된다.
히브리서 12장 10절에 “저희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케 하시느니라.”고 말씀하셨다.
또한 다니엘은 “많은 사람이 연단을 받아 스스로 정결케 하며” 라고 말씀하고 있다. 연단의 풀무불 속에서 모든 찌꺼기는 녹아 없어지듯이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환난과 고난과 핍박을 통하여 주님의 거룩한 성품에로 바뀌어 진다.
성경은 “환난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낳는다.”라고 밝히고 있다(롬 5:4)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된 우리가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고난의 삶을 통하여 주님의 거룩한 인격을 배우고 고난의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의 자존심이 꺾어지고 혈기가 녹아 버리고 온유하고 겸손한 주님을 닮아가게 된다.
3) 살아계신 주님을 체험할 수 있다.
주님은 그를 따라가는 제자들이 고난을 당할 때 외면하시거나 방관하시지 않고 그 고난의 현장에 찾아 오신다. 삼킬 듯이 덤벼드는 거센 파도가 이는 바다를 잔잔케 하시면서 제자들의 마음에 이는 죽음의 풍랑을 고요케 하시므로 살아계신 주님을 체험케 하셨다.
물 위로 걸어가실 때 그들이 당황하면서 쳐다볼 때,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안심시켜 주시므로 전능하신 하나님을 체험케 하셨다.
온몸에 매를 맞고 착고에 채여 깊은 옥중에 던짐을 받은 바울과 실라가 받은 말할 수 없는 고난 속에서 오히려 그들만 체험할 수 있는 말로 다 형용할 수 없는 놀라운 주님의 역사의 손길을 체험할 수 있었다.
사랑하는 자와 사랑하는 이가 고통을 당할 때 그 아픔을 보고 그대로 있을 수 없는 법이다. 주님은 사랑하시는 그의 제자가 고난을 당할 때 쏜살같이 달려 오셔서 그 고난을 대신 져 주실 것이다.
한번은 스펄젼 목사님이 질병으로 몹시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 성도들이 찾아와서 목사님을 위로하여 주었다. 그때 스펄젼 목사님은 “내가 확실히 아픕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이 사실을 아시기 바랍니다. 내가 아픔을 당하고 고난을 당하고는 있지만 그러나 그 아픔보다 주님은 내게 더 가까이 와 계십니다.”라고 말하였다.
제자는 그의 아픔보다 더 가까이 와 계시는 주님을 체험할 수 있다는 사실을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란다.
4) 영광의 내일을 기약할 수 있다.
바울은 예수의 복음과 그의 몸된 교회 때문에 말할 수 없는 고난의 인생 길을 살아갔던 위대한 예수의 제자였다. 가장 바람직한 모델 제자였다. 그는 말할 수 없는 고난 속에서 다음과 같은 빛나는 체험적인 고백을 노래하고 있다.
로마서 8장 17절 “자녀이면서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또한 18절에 “생각컨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밝혔다.
계시록 21장은 성경의 마지막 부분이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하는 계시의 말씀이다. 메시아의 왕국이 열리는 모습을 기록하였다. 이 신천신지의 세계에서 부활을 참예하는 주님의 제자들의 상급을 기록하여 놓았다.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당하고 짐승에게 경배하기를 거절한 사람들”(계20:4-5)을 격찬하고 영광의 환영을 받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 주님 때문에 고난을 당하고 핍박받는 자는 바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지배하는 주인공이 될 것을 밝히고 있다. 계시록 2:10에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결론적으로 영국의 목회자요 신학자인 토마스 왓슨은 “고난은 제 3의 성례”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 바 있다. 세례와 성만찬 못지않게 고난은 진정코 주님의 고난을 체험할 수 있고 또한 주님을 체험할 수 있는 은총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주님이 가신 길을 따라가는 것 그 자체가 고난이다. 그러나 현재 고난의 길은 바로 내일의 영광이 보장되어 있다. 주님을 위한 고난은 반드시 하나님이 보상해 주신다.
2023년 벚꽃이 만발하는 시즌에 고난 주난을 맞게 된다. 어떤 의미에서 고난과 고통 속에서 맞이하게 되는 이번 고난주간은 큰 의미와 감격이 있다. 어쩌면 주님의 십자가 아래서 참고 참았던 애환의 눈물이 터질지도 모른다.
“십자가 앞에서 주님의 십자가 의미를 이제 조금이나마 알게되었습니다.”, “주님 십자가외에 저의 마음을 위로할 길이 없습니다.” 하면서 내 영혼 속에서 눈물이 터져 나올지 모르겠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로마서 8:16-17).
히브리서 기자도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히브리서 12:12-13).
이번 고난주간에 주님의 고난을 더욱 깊에 묵상하고 고난의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참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길 축복드린다. 그리스도의 존귀하신 영이 십자가를 묵상하는 모든 그리스도의 제자들에 온전히 임하길 소망한다. 고난당하신 주님의 놀라우신 은총이 충만하게 임하시길 간절히 기도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