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일, 11월 29,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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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질서가 주는 자긍심

누구에게나 그러하듯 일요일 아침 일찍부터 잡혀있는 스케줄은 그다지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한참 전부터 약속을 해 놓은 지라 샌프란시스코 총영사관에서 나오는 순회업무에 지원을 가겠다고 나섰다.  가는 길 내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장면은 예전에 목격했던 엄청 북적북적하고 정신 없는 영사업무 현장.  게다가 이번엔 저녁 늦은 시간까지 한다니 종일 있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코로나 사태의 상황이 좋지 않은, 말 그대로 와(渦) 중에 치르는 출장업무여서 총영사관측의 분위기는 ‘조심, 또 조심’ 이었다.  여러 명의 직원들이 큰 차를 렌트해서 복사기며 서류들의 장비를 싣고 차량으로 콜로라도에 왔다고 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최근 발생한 큰 산불들로 고속도로가 통제 되는 바람에 안 그래도 먼 길을 여러 시간 돌아서 와야 하는 악 조건이었다는 말을 듣고서 일요일 아침에 조금 일찍 일어나기가 힘들었던 것이 혼자 조금 미안하기도 했다.  코로나 이전과 비교해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투명 칸막이가 설치되고 업무현장의 인원제한은 물론 대기자들의 동선까지 꼼꼼하게 챙기는 부산한 준비과정을 목격하면서 뭔가 다른 한국식 방역마인드가 느껴졌다고나 할까, 전에 느껴보지 못한 실무자들의 노고를 엿볼 수 있었다.

우르르 몰려와서 허겁지겁 번호 적인 쪽지 하나 받아 들고서 턱턱 숨이 막히는 좁은 공간에 수십 명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던 기억과는 대조적으로, 업무는 놀라울 만치 순조롭고 원활하게 진행되었다.  우선 대부분의 민원인들은 이미 사전에 스케줄이 되어 이메일로 방문시간을 통지 받아서 순서표 받자고 길게 줄이 늘어설 일이 없었다.  섭외된 업무장소도 사회적 거리 두기에 적절한 순환식 동선을 짜기에 좋은 곳이어서 금상첨화였다.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건 콜로라도 이민생활 25년간 처음 경험해 본 한국교민들의 시민의식이었다.  거의 모든 민원인들이 자신의 방문시간 5분전쯤 입장준비를 했다.  조금 일찍 온 사람들은 차량 안에서 대기하다가 시간에 맞춰 들어오는 모습도 여럿 볼 수 있었다.  필요한 서류에 대한 내용 숙지가 놀라울 정도로 잘 되어 있어서 현장에서 서류를 작성해야 하는 케이스가 그리 많지 않았던 것이 쾌적한 업무현장 관리에 가장 큰 일등공신이었다.  업무가 원활하다 못해 너무 일사천리 진행된 덕분에 길게는 이틀이 잡혀있던 일정이 하루 만에 처리가 되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저녁 늦게 스케줄이 되어있던 사람들에게 연락하여 원한다면 이른 낮 시간에 와서 서류접수 해도 좋다고 연락을 할 수 있었기에 첫날 일정조차도 계획보다 한참 일찍 마감 되었다. 

 어찌 보면 하나하나가 당연한 일들인데 그 당연함들이 한자리에 가지런히 줄을 서니 아름다운 질서가 되었다.  어떻게 알고 왔는지 도움을 주기 위해 나서준 자원봉사자들, 체육회가 전해준 고마운 마스크, 드러나지 않게 뒤에서 봉사한 한인회와 민주평통 임원들, 자신의 담당업무가 아님에도 기꺼이 자원해서 출장을 와준 총영사관 관계자들.  이러한 수고 위에 교민들의 시민의식이 더해지자 더 바랄게 없는 완벽한 행사가 된 것이다.

 해외에 나와 사는 교포들에게 모국에 대한 자긍심이란 그 의미가 작지 않다.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고, 한국 출신 운동선수들이 세계무대에서 선전을 해 주고, 대한민국의 방역이 다른 나라에 모범이 되고 있다는 등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긍정적인 뉴스들은 타국에서 이민자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눈에 보이지는 않아도 든든한 위로이자 위안이 된다.  자긍심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뉘앙스 자체가 거창해서 일까?  뭔가 커다랗고 대단한 일이 있을 때 솟아나는 기운일거라 생각하기가 쉽다.  실제로 필자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큰 경험이었다.  어느 특별하지 않은 일요일에 조용하고 아름다운 질서를 경험하고서 새삼 한국사람이라는 것이 자랑스러웠다.

김상훈 칼럼니스트
The Wine & Spirit Education Trust (WSET) Level II, 소믈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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