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일, 3월 22, 2023

여름 계곡

여름이면 찾아가는 계곡이 있다. 볼더 계곡의 어느 으슥한 지점이다. 초입의 사람들로 북적이는 곳은 절대로 가지 않는다.
이십년을 넘게 여기 살았어도 여전히 미국인 울렁증이 있는 언니 때문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찾아낸 그곳이 좋긴 하다. 물이 완만하게 흘러서 물장난하기도 좋고 큰 나무그늘 아래에 벤치가 하나 놓여있는 물가자리라 돗자리 펴고 싸가지고 온 음식들을 마음껏 펼쳐놓고 먹고 낮잠 자기에 딱 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이 옆에 앉을 자리가 없어 조용하고 사생활이 보장된다. 우리는 야외에서도 사생활이 보장되어야한다. 놀러 나가서도 미국사람들이랑 다른 것을 먹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몇 년 전만 해도 그 자리는 우리만의 독점이었는데 작년 여름에는 아침부터 점거하고 낚시를 하는 사람들이 있어 조금 일찍 서둘러가서 자리를 잡아야했다. 미국사람들 낚시는 우리처럼 한자리에 눌러 앉아서 하는 대낚시가 아니고 플라잉 낚시라 물에 젖지 않게 장화바지를 멋지게 차려입고 물속에 들어가 서서 휙휙 날려대는 것인데 앉은 자리에서 보고 있노라면 퍽이나 근사하다.

장화바지에 총잡이 모자를 아무리 멋지게 차려 입었어도 기럭지가 받쳐주지 않는 동양 사람이 짧은 다리에 장화 바지 입고 짧은 팔로 플라잉하면 구경거리도 안되지만 차려입지 않았어도 백인들은 다리가 길고 피부색이 하얘서 그런지 폼 난다. 그래서 동양인들은 플라잉을 안 하고 쭈그리고 앉아서 대낚시를 하나보다.


우리의 아지트 자리에서 수시로 사람들이 계곡을 따라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며 혹은 물길을 따라 내려가며 낚싯대를 던져대면서 멋진 경치를 배경으로 삼아 낚시 씬을 연출해 할리우드 영화 같은 장면은 많이 보여주지만 그 누구도 물고기를 잡아 올리는 것은 단 한 번도 보여주지 못했다. 물고기가 없는데 저러구 다니는 건지 아니면 그 포인트만 물고기가 꾀는 자리가 아닌지 생각하다보니 어쩌면 본시 물고기 잡는 것이 목적이 아닐 거란 생각도 들었다.


물길을 따라 물속을 걸어 다니는 것 자체가 즐거울 것 같았다. 계곡이라 시원한데다가 우리처럼 가만히 펼쳐놓고 계속 뭔가를 먹어대다가 다 먹으면 낮잠 한숨 자는 문화도 아닌데다가 미국사람들 먹는 건 워낙에 간단하고 뻔 하니까 펼쳐놓고 먹고 자시고 할 게 없으니 계속 움직여야 했겠지 싶다. 계곡 물속을 걸어 다니니 물놀이를 즐기면서 다리 운동도 되고 낚시 대를 계속 날려대니 팔운동까지 되고 움직이면서 바뀌는 계곡의 경치를 계속 감상 할 수 있으니 눈은 즐겁고 생각해보니 그거 참 좋은 취미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혼자서도 저렇게 다니는구나 싶다. 두어 사람이 같이 다녀도 좋고 물고기는 잡아도 좋고 안 잡아도 좋고. 잡아서 집에 갖고 가봐야 생선 비린내에 비늘에 내장까지 손질도 번거로우니 잡자마자 바로 놔주는 이유도 알겠다.


플라잉 낚시를 내가 한다 생각하고 눈감고 상상해보니 좋은 레저 활동이라고 깨달아진다. 꼭 직접 해봐야 아는 것은 아니다. 이만큼 지구에서 살아보니 어지간한 것은 가만히 마음속으로 그려보면 그림이 나온다. 옛날 개그에 ‘척보면 애~앱니다.’ 라는 말이 있었는데 그야말로 척보면 안다. 공자는 오십에 하늘의 뜻을 알게 되었고 육십에는 경륜이 깊어져 남의 말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고 했는데 공자의 경지에는 못 미쳐도 오십칠 세 생일이 지나고나니 척보면 대충 알겠고 더 알 때까지 이거다 저거다 갈라놓지 않으려 마음을 조심하고 더 알아도 모른 척 그저 좋은 면에 초점을 맞추고자 하니 맘이 우선 편하다.


맘이 편한 게 제일 중요하다. 지금 맘이 편하고 좋으면 과거도 좋았던 것 같고 미래도 좋을 것 같이 여겨지나 지금 맘이 편치 않고 현재의 삶이 불행하다 생각되면 과거도 좋았던 것보다 안 좋았던 것만 기억나 지난 삶도 불행했던 것 같이 생각되고 거기다가 미래의 삶인들 뭐가 그리 좋으랴 싶고 비관적으로만 비춰진다.


굴절된 거울엔 어떤 예쁜 사물도 굴절되어 보이듯이 우리의 마음이 왜곡되어 있으면 현재도 과거도 미래도 사실과 다르게 왜곡되어 생각되어 그것이 진실인 것처럼 여겨진다. 마음에 잡힌 주름을 바로 펴고 돈이 없으면 없는 대로 몸이 아프면 아픈 대로 받아들이고 나면 지금 이대로 완전하고 이대로 좋을 뿐 아니라 과거도 그리 나쁘지 않았으며 심지어 그대로 완벽하고 좋았었고 미래도 지금처럼 완전히 좋으리라고 여겨진다.


왜냐하면 지금 오늘 이순간이 과거였고 미래일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언제나 지금 이 순간뿐이었고 지금 이 순간뿐이고 지금 이 순간뿐일 것이니까.

권달래
아마추어 작가

콜로라도 거주
1985 중앙대 건축공학과 졸업

권달래
아마추어 작가, 1985 중앙대 건축공학과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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