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일, 9월 16, 2021

언제나 이긴다

나물이 그립고 먹고 싶어지면 시금치도 삶아서 무쳐먹었고 미나리도 삶아서 무쳐먹어 봤고 중국인 친구가 잔뜩 뜯어다 주었던, 그들 말로는 ‘시엉초’라고 하는 나물도 무쳐서 먹어봤다. 
시엉초는‘water cress’라는 영어이름이 있다. 우리말로 막 가져다가 붙인 이름인 듯 여겨지는 야생 나물들도 구글로 검색해보면 버젓이 영어이름이 나온다. 


명이나물도 ’Ramp,wild leek’ 라고 뜬다. 한 번도 먹어본 적은 없으나 사진으로 비교해보니 비슷하다. ‘Solomon’s seal’이라고 나오는 둥굴레의 영어이름은 한층 재미있다. 물속에서 자라나는 야채들은 미나리고 시엉초고 간에 모두 뭉뚱그려 ‘water cress’ 라고 하지 따로이 분류된 이름은 없는 듯하다. 


여름으로 접어들자 예전에 엄마가 철이 되면 삶아서 무쳐주었던 비름나물이 먹고 싶었다. 된장과 고추장을 약간 넣어 무친 비름나물은 어중간하게 털털하면서 시골스런 맛이었는데 나이가들수록 그 맛이 좋아져 철이 되면 비름나물이 생각났었다. 


한국에서는 마켓에서 흔하게 살 수 있었으나 여기서는 찾아 볼 수가 없었다. 몇 해 전에는 교회 권사님한테서 씨앗을 얻어 아파트 앞마당에서 키워 먹을 수 있었으나 그 후 몇 차례 이사를 했고 현실을 살아내느라 경황이 없어 비름나물을 한 동안 잊고 지냈었다. 헌데 작년여름 중국인 친구 뽕주네 집 텃에 무성하고 튼실하게 자라난 비름나을 만나 무척이나 반가웠다. 그녀의 인심덕분에 잔뜩 뜯어다가 무쳐먹으면서 엄마와 우리들의 어린 날을 추억하며 맛있게 먹었다. 후덕한 그녀가 엘에이로 이사 가는 바람에 올 여름부터는 그녀의 텃밭으로의 출입이 불가능해졌으며 때문에 아쉬운 것은 비름나물이었다. 


작년에 발코니를 화분들로 가득 채워 깻잎농사를 욕심껏 해보느라 매일 아침마다 물을 퍼 날라다 주면서 고생을 하긴 하였지만 수확의 커다란 기쁨을 맛보았기에 올해에도 일곱 여덟 그루 정도의 깻잎을 나무처럼 키워서 잘 먹고 있다. 단지 아쉬운 것은 비름나물이었다. 
구글에서 비름나물이 영어로 ‘아마란스’ 라고 알려주기에 아마존에서 씨앗을 오더하고 싹을 틔워 화분으로 옮겨 심고 수시로 들여다보았다. 씨앗이 후춧가루처럼 잘았는데 틔워진 싹들도 자디잔데다가 자라는 것도 무척이나 느려 기다리다 목 빠지겠다 싶었다. 


이발소에서 손님이 없을 때에는 운동 삼아 주변 동네길을 걸어왔다. 손님이 없어 한가한 날에는 짬짬이 걷는 걸음 수가만보가 되었고 일이 바쁜 날에도 오륙 천보는 되었다. 한가하면 한가한대로 좋고 바쁘면 바쁜 대로 좋았다. 무조건 이기는 게임, 이것이 위너게임 아니겠는가. 그렇게 동네 길을 매일 돌다가 문득 이집들 앞마당에서 비름나물을 찾아봐야겠다 싶었다. 


비름나물을 소나 말이 좋아하여 그 씨앗이 가축의 배설물이 비료로 제조될 때에 섞여든다고 한다. 비료를 줬더니 텃밭에서 비름나물이 저절로 자라났다는 이야기를 씨앗을 나눠주신 권사님한테서들었던 기억이 떠올라 그때부터는 남의 집 마당에 비름나물이 있나 없나 살피면서 걸었다. 
며칠 지나지 않아 드디어 어느 오래된 집 앞마당 잔디밭에 삐죽이 솟아나와 있는 비름나물을 발견할 수 있었다.  펜스가 쳐진 남의 집 앞마당에 들어갔다가 총 맞을까봐 펜스가 쳐진 외부 경계선을 살폈더니 미국인 집에서 대접 못 받는 비름나물들이 작지만 듬성듬성 구박받으며 자라있었다. 심봤다! 혼자서 쾌재를 불렀다. 


펜스 외부의 흙을 손으로 살살 파서 모종들을 옮겨다가 발코니의 화분에 심어 돌보니 크게 자라 꽃피고 지금은 한참 씨앗이 여물고 있다. 뜯어 먹을 만큼 충분히 자랐으나 씨앗을 받아 내년 농사를 야심차게 지어볼 생각으로 화초처럼 보면서 즐기는 중이다. 
어느 날 저녁 무렵 아파트 단지 내의 작은 호수와 넓은 잔디밭으로 강아지를 데리고 맨발걷기 하러 나갔다. 벤치에 앉아 잠시 쉬다보니 그곳에 나무로 네모지게 만들어 놓은 채마밭이 있었다. 뭐가 자라고 있나 가까이 다가가 보니 호박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고 다른박스에는 열무가 하나 가득 자라고 있었으며 또 다른 박스에는 그토록 간절하게 찾아 헤매던 비름나물이 잔뜩 자라 있는 것이었다. 


누가 여기다가 이런 것을 심어 키우는 걸까 궁금하여 꽂혀 있는 작은 표식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무슨 환경단체라는 글자가 보였다. 주민을 위한 채마밭을 만들어 놓았으나 그걸 뜯어다가 먹는 사람은 없었나보다. 가끔 누군가는 호박을 따가기도 했겠으나 열무와 비름나물은 아무도 손을 안댄 것이 분명했다. 


아시안이 아니고야 그게 뭔지, 그것도 내 나이 정도의 아시안 중에서도 보는 눈이 있는 사람이나 그게 뭔지 알아보고 뜯어갈 텐데 단지 내에는 대부분 젊은 사람들이 살고 있어 아무도 채마밭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호박도 몇 개 따고 비름나물과 열무를 적당히 뜯어서 남편과 나의 티셔츠 앞자락에 각기 넉넉하게 담아가지고는 신이 나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렇다. 넉 달 전에 결혼을 했다. 이제 내사전에 결혼이란 없다고 굳게 맘먹고 씩씩하게 혼자서 잘 살아왔는데 내 인생의 이 시점, 이 나이에 이곳 콜로라도에서 백인 아저씨와 결혼을 하게 될 줄은 진정 상상도 못했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오직 모를 뿐’이라고 하셨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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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달래
아마추어 작가, 1985 중앙대 건축공학과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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