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 사회에 귀감이 되는 사람을 찾아서 숨은 이야기를 발굴하고 알려지지 않은 아름다운 사랑과 헌신의 스토리를 전하려고 합니다. 이 코너는 사람을 알리거나 특정인을 높이기 위하여 기획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숨어서 묵묵히 봉사하는 손길을 찾아내고 그들의 수고와 사랑을 기록하므로 한인 사회를 아름답게 세워 가는 길잡이 역할을 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가정집처럼 편안하고 안락한 곳이 안나의 집 입니다.
오로라 Cherry Creek Reservoir 동쪽에 있는 안나의 집(13901 E Quincy Ave)을 찾았습니다. 그곳은 양로원이 아니라 가정집 같았습니다. 어르신들이 편리하게 생활할 수 있도록 모든 시설이 갖춰져 있었습니다. 분위기는 따뜻하고 정겨웠으며 다양한 꽃과 식물을 키우고 있어서 정서적 안정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90세가 넘은 할머니 다섯 분이 살고 계셨고 100세 된 어르신도 계셨습니다. 할머니들은 편안하고 안락하게 이 땅에서의 삶을 마무리하시는 중이었습니다. 필자가 나이 많은 여성이라면 ‘나도 이런 곳에서 마지막을 보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좋았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이분들을 돌보는 수녀님들 역시 나이가 많다는 점입니다. 그곳은 할머니가 할머니를 돌보는 노노(老老)케어 현장이었습니다.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안타까운 마음이었습니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나이 지긋하신 분들이 할머니들의 마음을 더 잘 살펴드릴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돌봄을 받아야 할 나이인데도 불구하고 더 나이 드신 할머니들을 돌보고 있다는 점 때문이었습니다.
안나의 집은 2002년에 만들어졌습니다. 사랑의 눈물이 없었다면 안나의 집은 만들어질 수 없었습니다. 눈물의 헌신과 기도가 없었다면 한인 할머니들이 안락한 노후를 보낼 수 있는 이런 시설은 없었을 것입니다. 수녀님들을 인터뷰하면서 안나의 집 시작부터 지금까지 이어지는 수고와 헌신이 얼마나 눈물겨웠는지 필자의 눈에도 눈물이 글썽였습니다.



안나의 집은 수녀님들의 사랑과 기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지금부터 20년도 더 된 2000년의 일입니다. 수녀 한 분이 한국에서 성 로렌스 성당에 발령을 받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의 일이었습니다. 성당에 다니던 여자 신자 한 사람이 친구를 데리고 와서 상담을 요청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야기를 들은 수녀님은 깜짝 놀랐습니다. 처음에는 잘못 들은 줄 알았습니다. 아니 오히려 부정하고 싶었습니다. 어떻게 세계 최고라는 미국에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인권을 중시하고 개인의 인격이 존중받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미국 땅 콜로라도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그 사람이 울면서 털어놓은 이야기는 이랬습니다.
“어머니가 치매에 걸렸습니다. 저는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집에서 어머니를 돌볼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어머니를 양로원에 모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행히 치매가 심한 상태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를 찾아뵈었는데 울면서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고 했습니다. 양로원에서 일하는 요양보호사 중에는 남자도 있다고 했습니다. 양로원에서 생활하는 어르신들은 자유롭게 일상생활을 이어나가지 못하는 분들이 대부분입니다. 따라서 요양보호사가 어르신들의 식사와 일상생활을 돌봐드리게 됩니다. 어머니는 목욕을 도와주는 남자 요양보호사에게 몹쓸 짓을 당했다고 울면서 이야기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가 그처럼 험한 일을 당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정신이 온전할 딸이 이 세상에 어디에 있겠습니까? 어느 아들인들 그 이야기를 듣고 분노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당장 쫓아가서 때려죽여도 시원하지 않을 만큼 분노가 차올랐습니다.
상담하러 온 사람은 우느라 이야기를 이어나가지 못할 지경이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수녀님의 가슴도 미어져 함께 우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성당의 상담실은 세 여성이 손을 붙들고 꺼이꺼이 흐느끼는 울음소리만 가득했습니다. 밖에서 누군가 이들의 울음을 들었다면 틀림없이 들어와서 함께 울었을 것입니다.
어떻게 할머니를 남자 요양보호사가 목욕을 시킬 수 있다는 말입니까? 한국의 요양원에도 남자 요양보호사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주로 힘쓰는 일이나 여성 요양보호사가 할 수 없는 일을 담당합니다. 할머니를 목욕시키는 일은 남자 요양보호사가 할 수 없게 되어있습니다. 하물며 미국에서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 날 이후 수녀님들은 묵묵히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콜로라도에 사는 한인 어르신들의 삶을 두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한국에서 온 나이든 어르신들이 미국 생활에 적응하기는 몹시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말이 안 통하니 자신의 의사를 제대로 표현할 수가 없었습니다. 음식이 입에 안 맞으니 식사하는 것도 즐거울 수 없었습니다. 뜨끈한 국물에 김치 한 보시기가 간절한 상황이었습니다. 미국인이 운영하는 양로원에 그런 음식이 있을 수 없었습니다. 어르신들을 위하여 한국 사람이 운영하는 양로원이 정말 간절히 필요했습니다.



수녀님들이 처음 할 수 있는 일은 버려진 통조림 캔을 모으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버려진 깡통을 모아서 양로원을 세운다고 하니 누가 듣더라도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였습니다. 사람들이 들었다면 코웃음을 쳤을 것입니다. 깡통을 주워서 어느 세월에 양로원을 세우냐고 말입니다. 그러나 성당에 소속되어 신자들을 섬기는 일을 맡은 수녀님들로서는 할 수 있는 일은 이것밖에 없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신자 한 분이 집에 모아둔 빈 깡통을 가지고 왔습니다. 한 사람 두 사람 깡통을 모아서 가져오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자 제법 많은 깡통이 모였습니다. 그러나 통조림 캔, 음료수 캔이 많이 모인들 얼마나 돈이 될까요? 고물상에 가져가서 받은 돈은 몇 달러에 불과했습니다. 그 길로 은행에 가서 계좌를 열고 저금했습니다. 안나의 집이 시작된 첫 출발이었습니다.
<다음 호에 계속>
-정바다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