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8월 8, 2022

등불을 켜다

손님 중에 젊었을 때 일본으로 건너 가 선교사 생활을 했던 목사님이 있다. 나 역시 일본에서 오년동안 살았었기에 서로 일본에 살았던 때를 이야기 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실로 오랜 만에 일본어로 대화를 시도해보았다.

예상보다 훨씬 훌륭한 그의 일어실력은 나를 놀래켰다. 그 때부터 그가 오면 이발을 하는 내내 우리는 일본어로 이야기를 나눈다. 그러면 그 분은 이십 후반으로 돌아가고 나는 삼십 중반으로 돌아가니 세월을 되돌리기는 아주 쉽다. 모르는 단어는 서로 가르쳐주기도 하여 일어회화 공부에 큰 도움이 된다.

농담을 좋아하시는 유쾌한 목사님은 어눌한 듯 적절한 일본어 묘사로 나를 계속 웃겨주고 우리는 이발 시간 내내 깔깔 댄다. 일본어의 뉘앙스가 우리말과 비슷해서 그 표현이 영어보다 가슴에 더 와 닿을 때가 많다.
한 번은 구십이 가까운 일본인 영감님이 옆자리에서 우리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다가 한마디 했다. ‘니홍고가 죠즈데쓰네에!’ (일본어를 아주 잘하는군요.) 발음도 어눌하고 실력도 어눌한 두 사람이 본인의 모국어로 끝도 없이 수다를 떠니 옆에서 듣기에 얼마나 웃겼을까 싶었다.

영감님과 같이 온 딸도 앞자리에 앉아있었다. 그녀는 내 나이보다 위일 듯싶었다. 우리 한국사람 같으면 외국사람 둘이서 한국말로 주고받으면 일찌감치 한마디쯤 거들었을 텐데 그녀는 내내 못들은 척 앉아 있었다. 일본인들의 성향은 보통 그렇다. 여기서 태어나고 자란 이민 이세, 삼세 중에는 자신들의 모국어를 모르는 사람도 많다. 그래서 그런가 보다 싶어 물어보니 그건 아니었다.
미국인인 자기 남편은 삼십년 가까이 같이 살아오는데도 일본어를 전혀 못한다면서 아쉬워했다.

목사님 교회의 신도 중에 남편이 일본 사람인 여인이 있단다. 그 말을 듣고 나니 이런 그림이 떠올랐다. 목사부부와 일본아내 미국남편 부부, 그리고 미국아내 일본남편 부부와 우리부부가 모임을 가져 두 팀으로 나뉘어 대화를 나누는 즐겁고 유쾌한 대화의 장. 배우자가 하나씩 양쪽으로 갈려 한 팀은 일본어로 얘기를 나누고 다른 쪽 배우자팀은 영어로 깊이있는 대화를 나누는 것.

가까이에 사는 친한 친구가 있다. 그녀의 남편은 꽤 유명한 소설가로 시리즈 스릴러물을 써오고 있다. 어느 날 그녀의 집에서 저녁을 함께하며 남편과 친구 부부를 서로 소개 하는 자리가 만들어졌다. 식탁에 네 명이 함께 앉아 식사를 하면서 친구와 나는 신경 써서 듣고 말해야하는 영어에서 벗어나 안테나를 꺼놔도 저절로 들리고 쏟아져 나오는 한국어로 마음껏 수다를 떨 수 있었다.
두 남자들 역시 자기들끼리 고품격 영어를 마음껏 구사하면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무척이나 신나보였다. 그 저녁식사는 네 사람 각자 대단히 즐겁고 편안하고 만족스러웠음에 분명하다. 특히 은둔 소설가 C는 방대한 지식으로 대화를 주도하고 이끌어 물 만난 고기처럼 신나했다. 역시 사람은 누구나 때때로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눠줘야 한다.

미국인 남편을 만난 나의 영어 실력은 빠른 속도로 일취월장 하는 것이 아니라 빠른 속도로 엉클어지고 있다. ‘얼레리?’ 라고 하려했는데 ‘벌레리?’ 라고 튀어나왔다, 벌써와 얼레디가 합쳐져서 그렇게 됐다. 한데 그가 알아듣는다. ‘그러니까 잍 잇 훠스트.’ 라고도 하고 말이다. 결혼 하면서 고급영어를 구사할 수 있으리라 회심의 미소를 지었었는데 이렇게 되어가고 있다.

나의 영어가 향상된다기보다 나의 한국식영어를 알아듣는 그의 실력이 향상되어가고 있다. 이렇게도 생각해본다. 좋고 싫음의 경계가 없어지고 내 것 네 것이라는 경계가 없어지고 네 나라 말과 내 나라 말이라는 구분이 없어져서 오는 언어 해탈의 경지가 온 건지도 모른다는. 영어와 일본어와 한국어가 모두 함께 버무려진 다국적 언어 신공의 단계.

지금은 일 년 중 가장 아름다운 계절이다. 특히 콜로라도의 가을은 황홀하게 아름답다. 언덕길을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운전하는 출퇴근길의 경치는 눈 돌리는 곳마다 캘린더 사진이다. 농담을 달리하는 녹색과 노랑, 그리고 빨강과 갈색의 나무들과 모형 같은 집들이 눈을 사로잡는다. 하늘을 파랗고 구름은 시시각각 모양을 달리하며 머리 위 가까이에 펼쳐지고 싸늘한 바람은 옷깃을 여미게 만든다. 여름의 풀어 헤쳐 짐과 소란스러움이 지나고 이 계절의 여밈과 차분함이 좋다. 늦게 뜨고 일찍 지는 해를 대신하여 이른 아침과 이른 저녁에 밝히는 작은 등불이 예쁘고 안정감을 준다.

예전 기억이 떠오른다. 아파트 이웃집들의 창문을 통해 나오는 불빛이 각 가정의 따뜻한 행복을 비쳐내는 듯싶었다. 우리집 창문을 통해 나오는 불빛은 어떨까싶어 마당에 나가서 거실창문을 통해 우리 공간을 들여다보았다. 지금도 가끔씩 우리집의 행복을 밖에서 바라다 본다. 이 존재들이 행복하구나, 하이 화이브!

권달래
아마추어 작가, 1985 중앙대 건축공학과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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