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야말로 뜨거운 반응이다. 이번 주 Amazon Books(아마존 도서)와 Barnes & Noble(반스 앤
노블), 양 거대 인터넷 도서 판매 사이트를 완전 점령한 베스트 셀러가 나왔다. 전 백악관
국가안전보좌관 John Bolton(존 볼튼)의 The Room Where It Happened (그 일이 일어났던 방) 이 그것이다.
이 책은 출판 이전부터 이슈의 중심으로 떠 올랐고 미 국무부가 워싱턴DC 지방법원에 회고록
출판 금지 소송을 냈으나 법원이 이 요청을 받아 들이지 않으면서 오히려 세간의 이목을 더욱
집중 시켜주는 효과를 낸 셈이다.
588페이지에 달하는 이 책의 내용이 공개 되면서 그 일파만파의 영향이 워싱턴 정가뿐 아니라
국제사회를 들썩이고 있다. 우선은 내용은 물론이거니와 출판 시기를 고려할 때에 이 책은 볼턴
전 보좌관의 ‘복수의 칼’ 성격이 짙다. 소위 ‘매파’ 인사로 불리며 초강경 안보정책을 펼치던
볼턴은 한 때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직선적인 성향과 궁합이 잘 맞는 듯 보이기도 했으나 재선을
고려해야 하는 트럼프에게 정치적 융통성이 더욱 절실해 지면서 결국 지난 2019년 9월 전격
해임으로 둘 사이는 파경을 맞게 된다. 특히 대북 문제에서 큰 시각차이를 보였던 만큼 이 책에서
그와 관련한 내용이 제법 큰 비중으로 다뤄 졌다.
이 책의 큰 줄거리는 트럼프 대통령의 무능력과 무지함 그리고 즉흥성에 대한 폭로와 그것에
대한 입증으로 서술되어 있는 비하인드 스토리들이다. 편향적 시각 때문에 자극적인 내용만
모아 각색했다는 비판이 있고, 대북 이슈를 바라보는 개인적인 ‘철학’이 과도하게 담겨 있어
지나치게 주관적이란 평가가 있으나 책 안에서 거의 ‘날것’으로 소개되고 있는 장면들에 비춰진
트럼프 대통령의 이미지나 외교사건의 뒷 이야기들을 모두 날조 된 거짓말이라고 볼 수는 없다는
반응도 크다. 실제로 백악관 스스로가 이 책 내용의 진정성을 비판하면서도 기밀사항 폭로를
문제 삼고 있다는 사실을 보면 표현의 문제를 걷어내고 본 상당부분이 팩트에 근거 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반증이라고 하겠다.
백악관 전 고위 관리의 ‘복수혈전’ 스토리가 한국의 관심을 끄는 이유는 그가 한때 북미관계의
핵심 컨트롤 타워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책 내용의 거의 4분의 1이상에 걸쳐 남북미 관계에 관해
이야기 하고 있다. 각 나라의 국가원수를 원색적인 표현으로 그려내면서, 미국 대통령은 무지
무능하지만 권력욕이 강한 이기적인 사람으로, 한국 대통령은 심각한 망상을 보이는 조현병(과거엔 정신분열증이라고 했던) 환자로, 북한 김정은은 얕은 노림 수를 가진 두 얼굴의 거짓말쟁이 독재자로 묘사하고 있다. 한반도 평화를 임기 내 가장 큰 치적이자 핵심과제로 달려왔던 현 정권에게는 남의 나라에서 일어나는 전직 관리의 ‘막가파’식 폭로전의 불똥에 피할 길 없이 얻어 맞았다고도 볼 수 있겠다. 북한도 미국도 원치 않는데 한국이 어떻게든 끼어들어
존재감을 가져보려고 억지를 쓰고 떼를 부렸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정치적으로 북한을 이용하는 것이 가장 큰 관심이었지 정작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엔 아예 관심이 없었고, 북한 역시 어떻게든 핵 보유국으로 인정받고 경제제재를 풀어내는 데에만 목적이 있었을뿐 남한은 그 과정상의 도구 정도로 이용하려 했을 뿐이었으나 한국만 환상을 쫓으며 결국 헛물을 켤 수 밖에 없었다는 논리로 볼턴은 정리하고 있다.
회고록의 내용은 충격적이다. 파장을 일으키고자 맘 먹고 쓴 책이니 오히려 당연한 결과이겠지만 이 책을 통해 볼턴 전 보좌관은 어마어마한 분탕질을 하고 말았다. 본인의 목적이
복수와 존재감이었다면 재선을 목전에 둔 타이밍에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볼 수는 있겠으나
그것을 위해 결코 넘지 말아야 할 선을 그것도 많이 넘었다.
역사 속 어느 시대에도 정치와 외교는 보이는 곳과 보이지 않는 곳의 두 영역에서 이루어졌다.
보여지는 곳에서의 성과 뒤에는 항상 음지에서의 협의와 협상, 치열한 흥정들이 있어 왔음을
역사는 또렷하게 그러나 시간이 충분히 지난 후에 보여준다. 볼턴의 회고록은 말이 회고록이지
대부분 아직도 현안인 문제들에 대해 말 하고 있다. 폴 나카소네 미국가안보국(NSA) 국장은 이
책이 귀중한 자원, 정보원의 영구적 손실을 야기하고 미국 정보 시스템에 손상을 가할 수 있다고
말한다. 수 년에 걸친 외교전의 결과가 채 나오기도 않은 사안에 대해 이 같은 이기적 폭로는
그야 말로 내가 못 먹는 밥상 걷어차는 경망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얼마 전 북한이 남북연락소를 폭파하고 나서, 사건 직전에 한국이 특사를 제안(그들의 표현으로
구걸) 했다는 외교적으로는 비공개가 상식인 내용마저 공개하는 일이 있었다. 스스로를
‘보통국가’ 이하로 추락 시키는 저급한 외교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볼턴의 이번 회고록 또한 이와
맥락이 비슷하다. 어느 국가, 어느 정권이 행하는 특정 정책을 지지하고 말고의 문제를 떠나 이런
식의 횡포는 명백히 반칙이다. 이미 내뱉어진 말들이라 그 진위여부에 대한 수 많은 이야기들이
있을 것이다. 어떤 내용들은 해당 정권에 치명적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볼턴의 몰상식이
수백 년 쌓아온 국제외교질서에 상채기를 내는 장면을 목격하면서는 씁쓸한 마음이 크다.
외교는 품위와 명분으로 겨루는 경기이다. 룰이 없는 경기엔 질서가 없다. 최소한의 룰을 지키지
못하는 자가 레드카드를 받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