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한국 예능 프로그램을 보다가 몇 년 전 크게 히트하여 이제는 모르는 사람보다 아는 사람이 더 많을 법한 노래, ‘아모르 파티’가 나오는 장면에서 고개를 갸우뚱 할 일이 있었다. 노래가 시작할 즈음 화면에 한국어로는 ‘아모르 파티’, 그 옆엔 (amor fati)라고 자막이 뜨는 것이었다. 신나는 댄스 풍의 노래여서 더 그랬을까? 가사나 제목에 별 신경을 쓰지 않고 가끔 이 노래가 나오면 흥얼거리기는 했었던 터라 당연히 ‘파티’는 ‘party’ 일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제작진이 자막에 실수를 했나 하는 의심을 하다가 마침 손에 쥐고 있던 휴대폰으로 우연찮게 검색을 해 보았다.
Amor fati 는 라틴어 였다. 영어로 하자면 ‘love of fate’ 정도가 되겠다. 즉 ‘운명에 대한 사랑’이라는 한국어 해석으로 풀어 볼 수 있다. 이 오래된 라틴어구를 유명하게 만든 사람이 바로 독일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1844~1900)다. 그는 1882년에 펴낸 책 ‘즐거운 학문‘에 “나는 필연적인 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보는 법을 배우려 한다. 그리하여 나는 사물을 아름답게 만드는 자가 될 것이다. 아모르 파티(amor fati)! 지금부터 이것이 나의 사랑이어라! 나는 추한 것과 전쟁을 벌이지 않으련다. (중략)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오직 긍정하는 자가 되려 한다”고 썼다. ‘운명을 사랑하라’는 표현을 얼핏 보고 들으면 운명에 굴복하고 순응하라는 이야기처럼 받아들일 수도 있다. 하지만 ‘신은 죽었다’고 말한 니체는 진정한 운명의 주체로서 인간에게 필연적으로 다가오는 운명을 감수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오히려 긍정하고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여 사랑하는 것이 인간 본래의 창조성을 키울 수 있다고 얘기 한다. 따라서 자신의 운명은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개척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잘 알고 지내는 나이 지긋하신 지인 분이 습관처럼 하시는 농담스런 표현 중에 ‘6.25때 난리는 난리도 아니다’ 라는 말이 있다. 전후(戰後)세대는 그저 상상만 할 수 있는 그 당시 혼란상을 뒤집어 예상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작금의 코로나 사태만큼 인류역사에 전 세계적으로 큰 재앙은 없었다. 실로 거의 대부분의 일상이 영향을 받았고, 일상의 기준이 뿌리 채 흔들려 이동하고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공포와 공존하는 법을 찾아 몸에 익혀 내기엔 너무도 빠른 시간 안에 일어난 일이다. 어설픈 치료제를 손에 겨우 쥐었고, 아직 개발중인 백신을 기다리는 우리에게 들려오는 말은 ‘바이러스의 종식이란 없다’ 라는 잔인한 현실뿐인 상황이다. 게다가 몇 개월 싸우고 끝이 났던 메르스, 사스와는 차원이 다른지라 끝이 보이지 않는 이 싸움에서 우리는 어느 정도에 와 있는지도 지금은 알 길이 없다.
난리 중에 희망을 이야기하기가 쉽지는 않으나 돌이켜 보면 코로나 사태로 새삼 깨닫게 된 내용들이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지난 몇 달 동안 얼마나 오랜만에 휴식을 취하고 있는가? 대기의 질은 그간의 어떤 정책이나 합의가 이뤄냈던 것보다 크게 향상되었다. 방역차원에서 시작된 자택근무와 사회적 거리 두기의 반대 급부로서 가정과 가족이라는 가치가 새삼 재조명 되고 있는 것도 의미가 있다. 정확한 통계가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5월 한 달 동안 판매된 새 자동차의 숫자보다 입양 또는 분양된 반려동물의 숫자가 더 많다는 기사도 있었다. 물건(Object)으로부터 관계(Relationship)로 사람들의 시선이 옮겨 간다는 반증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비관의 시간이 길어지면서 우울증과 무기력증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다고는 하나, 결국 현대의학과 과학은 어떻게든 이 질병과의 싸움을 해결해 낼 것이다. 어둠이 짙을 수록 새벽이 가깝다는 말이 있 듯이 오늘의 암담함도 머지 않아 무용담거리가 될 수 있기를 바래본다. ‘코로나 때 난리는 난리도 아니네..’ 하는 농담도 할 수 있게 말이다. 전례가 없는 이 사태를 겪어내면서 사회도 사람도 쉬 지나쳐 버리던 많은 소중한 것에 눈을 돌릴 수 있는 계기를 가질 수 있다면 그거야 말로 ‘아모르 파티(amor fati)’ 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